[스크랩] 감춰진 암살 사건

2014. 7. 18. 23:21진실

동지를 배반하고 독립군으로 위장했던 이승만.




살아생전 자신의 우상화 일환으로 남산에 북한의 김일성 동상보다 더 큰 81척(8층빌딩높이) 세계제일의 동상을 세운 미친 늙은이 우남 이승만 희귀사진.4.19당시 대학생들에 의해 끌어내려지는 사진, 요 몇 년 전 넋빠지고 혼빠진 썩은 국회의원들이 여야로 합동해 여의도 국회에 이승만 동상을 다시 세웠는데 여론 물타기 용으로 존경받아 마땅한 신익희 선생 동생을 세운다는 명분으로 슬쩍 끼워넣어 세웠다.(이것도 판사출신인 썩은 역사관 소유자 한나라당 목요상이 중심되었다) 노무현이 경제정책에 고전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조중동이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는 것을 보면 서민정책위주가 아니라 한국에 뿌리깊게 내린 이들 기득권 보수층 및 재벌편향적인 정책을 뒷받침하는 한나라당보다는 낫다는 것을 각골명심해야 한다. 즉 특수한 상황에 처한 한국의 꼬인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노무현으로부터 경제는 크게 바라지 말라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 개혁의 과정은 아노미 현상이 수반된다. 더욱이 지금은 세계경제가 어려울때고 한 술 더 떠 우리는 북미 핵문제가 걸려 전쟁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상황이다. 노무현은 정치개혁을 위해 자신을 서포팅하는 여당마저 포기한 사람이다. 여야가 얼마나 썩었으면 젊은 김두관이 정치권을 향해 쓰레기통이라 했을까보냐. 이는 해방이후 경제정의는 고사하고 정치정의마저 아직 자리잡지못한 한국특유의 복마전을 웅변하는 말이다 (안원전)


중앙정보부 창립멤버 조웅 목사의 현대사 X파일 ;백범 살해 사건에 개입된 이승만 정권 권력 실세들이‘비밀 유지’를 위해 김창룡, 이기붕의 지시를 받는 암살 공작단 3인방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가공할 주장이 나왔다. 채병덕,장은산, 신성모, 이기붕일가가 이들에 의해 살해됐다는 것./김지형(민족21 기자) “대통령 후보 신익희 조병옥도 이승만 정권‘암살 청부업자들’에 살해당했다” 조웅목사의 현대사 증언 2탄 역시 이승만 정권기 ‘암살커넥션’이다. 이승만과 맞섰던 역대 대통령 후보들인 신익희, 조병옥과 이승만의 정적이었던 최능진, 이용문 등도 이승만 정권에게 살해 당했다는 가공할 주장이 또다시 조 목사의 입에서 나왔다. 게다가 이승만 암살미수사건, 장면 저격사건, 서민호 총격사건 등도 이른바 CIC 삼총사가 일으킨 자체 조작사건 또는 배후 조종사건이라는 주장이다.Click here!

조웅 목사는 본지 2 0 0 2년 1 2월호를 통해 이승만 정권이 암살 청부업자들을 동원해 백범살해사건에 개입된 신성모 채병덕 장은산 이기붕일가 등을 보복살해 했다는 주장을 편 바있다.그 후 다시 만난 조웅목사.그는 이번에도 이른바‘이승만 정권기 암살커넥션’과 관련해 또 다시 깜짝 놀랄 만한 얘기를 털어 놓았다. 해공 신익희, 유석 조병옥 등도 암살청부업자들에게 희생됐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첫 증언때와 마찬가지로 이승만 정권기 방첩대(CIC) 3총사라고 불리던 최0, 조00, 엄0 0의 증언에 기초한 것이다.열차안 판매원 매수, 해공 독살-해공은 1 9 5 6년 제3대 대통령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 선거 유세차 호남으로 향하던 중 열차안에서 돌연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한 조목사의 주장이다.“경무대(현 청와대) 비서실장 이기붕이 엄0 0과 최 0을 통해 김지웅으로 하여금 해공선생을 제거토록 한 것입니다. 이 세사람은 해공이 탄 열차에 같이 있었습니다. 엄과 최가 김지웅을 시켜 열차안에서 먹을 것을 파는 장사꾼을 매수해서 해공에게 독을 탄 물을 마시게 하는 수법으로 암살했습니다.”

19 5 6년 제3대대통령선거후보로 출마했던 해공신익희가 급서, 국민장으로장래식을치르는장면.

충격적인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해공이 독살당했다는 주장이 새로운 건 아니다. 해공 사망 직후 학생들을 비롯한 해공의 지지자들이 경무대 앞에서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 후 이들은‘5·5동지회(회장 유치송)’를 결성해 활동해 왔다. 사건 직후 해공이 독살 당했다는 입소문이 퍼지기도 했지만 정확한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껏 사망원인이 뇌일혈이라는 둥 심장마비라는 둥 분분한 상태다. 계속되는 조목사의 설명이다.“해공이 죽은 때가 5월인데 그렇게 더울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해공의 부인에 따르면 이틀만에 창자가 완전히 썩었다는 거예요. 독약을 마셨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겁니다.”

조목사의 주장은 해공의 사인과 관련해 새로운 논란을 불러 일으킬 만하다. 특히‘암살’의 배후인물과 실행자를 명확히 하고 있는 점이 새롭다. 그렇다면 그가 밝힌 실행자라는‘김지웅’은 어떤 인물인가.김지웅은 평북 용천 출신으로 일제시기 만주 관동군의 헌병 통역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후 귀국하여 왕금산장군을 자처하면서 고급 정보 브로커 노릇을 하던 자로서 실체가 모호한 인물이다. 극우 성향의 반공주의자인 그는 이승만 정권기 굵직한 시국사건에 연루된 인물로 묘사돼 왔다. 다만 백범 암살사건의 각본을 짠 인물이라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의혹 속에 가려진 정치 브로커라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 자가 해공 암살의 실행자라는 주장은 처음 제기된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 이기붕과CIC 삼총사가 있었다는 얘기다. 조 목사가 폭로하는 암살 커넥션의 또 다른 희생자는 조병옥이다. 이승만 시절 내무장관을 역임하기도 했으나 1 9 5 4년 야당인 민주당을 조직하면서이승만의 정적으로 급부상한 유석 조병옥.


[빗속에치러진 조병옥의 장례식 장면]

1 9 6 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입후보하여 자유당 대통령 후보 이승만과 대결하던 중 신병치료차 미국 월터리드육군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으나 그해 2월 1 5일 월터리드 병원에서 운명했다. 그런데 그의 죽음에 암살 청부업자들의 손길이 미쳤다니.

“조병옥이 병 치료를 위해 미국에 갈때 엄0 0의 진두지휘 하에 김지웅을 비롯해 4∼5명이 갔다고 해요. 여성도 한 명 동행했다고 합디다. 월터리드 병원에서 일하는 흑인 여성 한 명을 돈으로 매수해서 수술 후 경과가 좋았다고 하는 조병옥을 암살한 거죠. 김지웅은 일본어와 중국어는 물론 영어도 능통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내가 엄0 0에게 직접들은 이야기입니다.”

이승만이 출마한 대통령 선거전에 야당후보로 대결한 신익희, 조병옥 등이 모두 이승만 정권의 암살 청부업자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최능진도 우리 손에서 보냈다”

조웅 목사는 이승만의 정적들이 비명횡사한 또 다른 사례로서 최능진을 들었다. 이른바 CIC 삼총사가“최능진도 우리손에서 보냈다”라고 실토했다는 것이다.일석 최능진. 평남 출신인 그는 부유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유학할 때 안창호가 이끌던 흥사단에 참여했다. 해방후 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 치안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후 곧 월남해 미군정 산하 경무국수사과장으로 경찰계에 입문한 후‘친일경찰청산’에 발벗고 나섰다. 그러나 그의 경찰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경찰책임자인 조병옥,장택상 등과 친일경찰 청산문제로 대립한 후 옷을 벗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승만과 대립한 것은 이 때만이 아니다. 1948년 5·10 단독선거가 강행되자 최능진은 이승만의 정권 장악을 염려, 그가 출마한 동대문 갑구에 입후보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극우 친위대 노릇을 하던 서북청년단 소속의 괴한들에게 입후보 관련서류를 탈취 당해 좌절됐다. 결국 이승만이 무투표 당선되고 말았다.

이 때문이었을까. 정부수립 후 한 달 보름만에 그는 이른바‘인민해방군사건’에 연루돼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되고 말았다. 그러나 1 9 5 0년 6·25 전쟁이 나자 극적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 유엔군의 서울점령 후 서서히 정계인사들과 만나던 그는 그 해 1 1월 다시 구속됐다. 당시 최고의 권력 실세였던 군경검 합동수사본부장 김창룡의 지시에 따른 결과였다. 군사법정에서는 사형을 선고, 전쟁이 한창이던 1 9 5 1년 2월 운명을 달리 하고 말았다.

조 목사에 따르면 이렇게 희생된 최능진이 바로 김창룡의 심복들이던 CIC 삼총사의‘손에서’나온 결과였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6·25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 9 5 3년 6월 헬리콥터 추락사고로 사망한 이용문장군도 음모에 의한 암살사건이라는 게 조웅 목사의 주장이다. 이용문은 현 한나라당 이건개 의원의 부친이다. 6·25 당시 이종찬 육군참모총장 직속 작전국장이던 이용문은 1 9 5 2년 이승만을 몰아내기 위한 미국 주도의 쿠데타를 계획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조 목사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부산정치파동’당시 이승만이 이종찬에게 계엄선포를 위해 병력 동원을 요구했으나 전시라는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이 일로 이종찬은 무릎을 꿇은 채 이승만에게 사표를 내야 했어요. 이종찬 밑에 있던 정보국장 김종평 장군은 이 때의 일로 생식기를 못쓰게 될 정도로 고문을 당했습니다. 이용문도 작전참모부에서 강등당해 남원에 주둔하던 남쪽경비사령부(남경사)로 배치돼 공비토벌 사령관임무를 맡아 사지로 내몰렸죠.
이승만 정권은 이것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회의를 소집해 놓고 삼총사를 동원해서 그가 탈헬리콥터기장을 매수해 휘발유를 적게 넣은 채 비행하다가 고의로 추락사고를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 역시 삼총사에게 직접 들은 얘기입니다.”

장면 암살 미수의 배후 최훈 = 삼총사 일원 최 0?

이 뿐만이 아니다. 이승만정권기 크고 작은 암살미수사건에 CIC 삼총사가 관여 돼 있다는 주장이다. 1952년 이승만 암살미수사건도 최 0 등 삼총사가 관련된 자체조작사건이라는 것이다. 6·25 2주년 기념식장에 참석한 이승만은 항일 독립운동단체의 열단 출신인 나재하의 권총 세례를 받았다. 이승만 등 뒤 2미터 거리에서 방아쇠를 당겼지만 무슨 일인지‘찰칵’하는 소리만 난 채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다. 또 한번 방아쇠를 당겼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불발이었다.

나재하는 현장에서 붙잡혔으며 이후 또 한명의 공범이 드러났는데 역시 독립운동가출신인 김시현 옹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경찰 조사 결과 나이 일흔살을 넘긴 김시현옹이 권총을구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조 목사에 따르면 최모 등 삼총사가 김시현 옹에게 권총과 총알을 건넸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왜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을까.

“실제로 총알이 발사됐다면 큰일나는 것 아닙니까? 최 0이 이들과 접촉해서 한 달 동안 물에 담궈둔 권총알을 제공해 고의로 불발사건을 일으키고 이승만권력을 한층강화하는데 이용한것이죠.”

조목사는 최 0, 엄0 0이“그 사건은 쇼였으며, 우리 손에 한 번 들어오면 꼼짝 못한다”고 했다는 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 사건으로 삼총사의 직속 상관인 김창룡은 별은 하나더 달았다고 하면서 자기들끼리 논공행상을 하더라는 것이다. 1 9 5 6년 당시 부통령이던 운석 장면저격사건의 배후에도 삼총사가 있었다고 한다. 고령의 이승만이 유고시, 승계권을 갖고 있던 장면을 부담스럽게 여긴 이승만측근들이 삼총사를 움직여 암살을 기도한 사건이라는 얘기다.

“삼총사중 한 명인 엄0 0에 따르면 운석에게 시공관행사(민주당전당대회)에‘나가지말라’는 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운석이 우리말까지도 안 들었다’는 얘기를 했어요. 그 사건은 중부경찰서경위가 총지휘를 했다고 합니다. 또 자금은 임흥순이 댔다는 거예요. 이익흥 내무장관, 김종원 치안국장도 관련이 있답니다. 엄 0 0은‘총알이 손에 맞은 게 다행’이라는 얘기를 하더군요.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는지…”


암살범김상붕이쏜총에맞은장면부통령

장면 저격사건(담당 검사 이홍규)의 범인은 이북출신의 김상붕이었다. 당시 신문보도에 따르면 처음에는 단독범행을 주장하다가 경찰이 약속과는 달리 자신을 용공 혐의자로 몰고 가려하자 이기붕 부통령, 이익흥 내무장관, 김종원 치안국장, 이기붕의 최측근 임흥순으로 이어지는 배후세력을 털어 놓아 경악시켰다.

조목사가 전하는 엄0 0의 증언은 지난 1 9 9 8년 M B C의 8·15 특집물〈잃어버린 공화국 - 장면과 민주주의〉에서 인터뷰한 범인의 증언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1 5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그는“자유당 비밀당원 최훈을 통해 접선되었는데 최훈의 배후에 자유당 정책위원이며 자유당내 강경파의 일원으로 이기붕의 측근이던 임흥순이 있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따라서 그의 증언으로 볼 때‘자유당의 비밀당원 최훈’은 바로 조 목사가 주장하는 삼총사의 일원인 최모일 가능성이 짙다.

“독재자의 이용물이 된 딱한 청년”

이밖에 1 9 5 2년 4월 발생한 서민호의원 총격사건도 삼총사의 공작에 따른 결과라는 주장이다. 월파 서민호는 일제시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바 있는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사건당시 그는 제2대 국회의원이자 내무분과장으로 있으면서 전쟁기 발생한 국군에의한 거창 양민학살사건과 제2 국민병으로 조직된 수십만의 국민방위군을 기아와 동상으로 희생시킨사건을 집중성토함으로써 당시 이승만 정권의‘눈에 가시’와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해 추진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앞장서서 반대한 인물로서 그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반감은 극에 달했다는 평가다.

그러던 차에 그가 우연히 말다툼 중에서 창선 대위를 권총으로 쏘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서대위가 먼저 쏘자 다급해진 서 의원이 피하면서 소지하고 있던 모젤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이 사건으로 ‘정당방위’라는말이 널리유행하게 됐다. 월파는 훗날《이래서 되겠는가》(1970, 환문사)라는 책에서 그때의 사건을 소상히 회상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사고당일 부산에서 순천으로 내려갈 때부터 괴한들이 미행하기 시작했으며 순천에 도착한 후 급기야밤중에 군인복장을 한사람등이 찾아와 자신의 일행과 일부러 말다툼을 하면서“서민호나오라. 쏜다”고 악을쓰며 권총을 빼들고 설쳤다는 것.

바로 그 순간 월파는‘저들이야 말로 나를 여태껏 미행해 온 계획적인 공작대원일 것’이라고 직감했다고 한다. 그의 예감은 결국 사람이 죽는 커다란 사고로 이어지고 말았다. 그는 회고록에 서서 창선대위에 대해 언급하며“독재자의 이용물이 된 딱한 청년”으로 묘사했다. 사건 당시부터 배후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조웅 목사는 이 사건이 바로“삼총사가 서창선을 배후에서 조종해 일으킨 사건”이라고 했다. 그러나 삼총사와 서창선이 어떤 관계이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배후조종을 한 것인지에 대한 더 이상의 구체적인 증언은 없었다.

아직까지 서민호총격 사건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번 증언은 그 배후의 단초가 드러났다는 점에서 새로운 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당시 미묘한 정국 하에서 발생한 돌출 사건이라는 점에서 많은 의혹을 남긴 사건이지만 반세기가 지나서야 사건의 진상을 캘 실마리를 잡았다는 점에서 의미는 적지 않은 듯하다. 조 목사가 전하는 이승만정권의 암살 커넥션,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현대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로 충격적이다. 이승만의 핵심측근이던 이기붕과 김창룡의 사주에 따라 움직인 암살청부업자들이 야당대통령후보들과 국회의원을 비롯한 이승만의 정적들을 제거 했다니…과연 사실일까.


*불법 대선자금을 수사중인 대검 중수부(안대희 검사장)는 지난해 대선 당시 한나라당이 대기업등으로부터 받은 불법 대선자금 규 모가 700억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수사중인 것으로 8일 확인됐다. 검찰은 그러나 당시 노무현후보측의 불법 대선자금 규 모는 100억원 미만인 것으로 보고있다.검찰 고위관계자는 이날 기자에게 “한나라당의 대선 비자금 규 모는 상상을 초월한다”고 밝혀 수사 결과에 따라 액수가 더 늘 어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검찰의 또다른 고위관계자는 불법대선 자금 규모에 대해 “액수가 계속 늘고있어 지금 전체규모를 정확 히 산정할 수는 없지만 엄청난 액수인 것만은 분명하다”면서 “ 수사팀에서 기업별 액수를 취합해 당별로 총액을 발표하도록 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앞서 검찰 수사관계자는 “현재까지 파악 된 한나라당의 불법대선자금 규모는 800억원은 안되지만 민주당 보다는 훨씬 많은 수준”이라고 말했다.원본확인Click here!
*일반국민도 선거 때 돈이 오가는 줄은 대개 짐작한다. 그러나 국가를 이끌겠다고 나선 대통령 후보진영이 이렇게 조직폭력배 집단의 수법으로 자금을 뜯어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선거 내세워 돈 갈취하는 '정치브로커' 집단인가) 대선 때 한나라당에는 무슨 중앙대책위원회가 가동되고 있었고 직능위원회도 움직였다. 이 후보측은 중앙당 외에 사조직인 부국팀을 가동했다. 모두가 선거자금을 뜯어내는 것이 주임무였던 모양이다.그러고서야 어디 국가와 국민을 이끌어 가는 정당이라 할 수 있는가. 선거를 내세워 돈벌이에 나선 정상배나 정치브로커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지경이다. 실제로 후보의 측근이라는 인사들 중엔 그렇게 모은 선거자금을 유용, 착복한 경우도 비일비재하다는 얘기도 들린다.돈을 전달한 방법도 영락없는 조폭 영화의 한 장면 같다. 150억원을 63개의 박스에 현금으로 담아 2.5톤 트럭에 실어다 넘겨주었다고 한다. 또 지난번 최돈웅 의원의 'SK 100억원'은 건물 지하주차장에서 은밀히 주고받았다고 했다.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대통령후보 진영과 일류기업 사이에 이루어진 '거래'일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조폭집단의 범죄행태라고 밖에는 달리 적절한 표현이 없어 보인다.원문Click here!
현대차도 한나라당에 불법대선자금 1백억원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LG와 마찬가지로 ‘차떼기’ 방식을 이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 현대차도 ‘차떼기’ 1백억 전달-  불법 대선자금을 수사중인 대검 중수부(안대희 검사장)는 12일 서정우 변호사가 경기고 10년 후배인 현대차 최한영 부사장에게 먼저 돈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서 변호사에게 부탁을 받은 최 부사장은 이를 김동진 현대차 부회장에게 보고했으며 김 부회장은 다시 현대 캐피탈 이상기 사장에게 돈을 마련할 것을 지시해, 이 사장이 현대캐피탈 사옥 지하 4층에 보관하고 있던 현금 1백억원을 50억원씩 2회에 걸쳐 최 부사장을 통해 서 변호사에게 전달했다. 이 과정에서 이 사장은 현금 1백억원을 80개의 상자에 남아 담아 50억원씩 40상자를 스타렉스 승합차에 실어 이틀에 걸쳐 양재동 청계산 주차장으로 옮겨 놓고, 최 부사장은 LG때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50억원이 실린 스타렉스 승합차를 저녁 때 경부고속도로 ‘만남의 광장’으로 몰고가 차 키를 서 변호사에게 전달하는 방식을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두 인물이었던 김구 선생과 이승만 대통령의 얼굴을 비교해 보면 대조적이다. 현실 정치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승자요, 김구 선생이 패자였다. 이승만은 대통령 재임 때 남산 팔각정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또 지폐에다 당신의 초상까지 새겼지만 4·19 혁명 후 당신의 동상은 쇠사슬에 묶여 종로 을지로 네거리에 끌려 다녔고, 지폐는 곧 다른 인물로 바뀌어 버렸다. 하지만 백범 선생은 이 대통령 사후에 남산 공원에 동상이 세워져 지금도 참배하는 이가 줄을 잇고 있다. 백범 선생의 초상에서는 순박하고 인자한 모습이 마치 조선의 무명천이나 투박하고도 담박한 백자를 떠오르게 하는 데 견주어, 이 대통령의 초상에서는 어딘가 탐욕스럽고 노회(老獪)하며 질이 낮은 외국산 도자기와 같은 천박함이 풍긴다.-(오마이뉴스 박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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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을 제자로 둔 송재 서재필마저 자신의 송재일기에서 이왕가의 후손인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그 호사와 사치가 한계를 넘었다고 비판한다. 상해임정의 더러운 뒷골목을 거지헐랭이 옷을 입고 그  속에 윤봉길 의사의 거사에 쓰일 폭탄을 숨기고 다닌 김구(백범일지 참조)와는 천양지차로 미국에서 상해로 보내져야 할 독립운동자금을 가로채 물쓰듯 쓰며 당시로서는 미국 최고위층이나 최고 상류층 인사나 탈 수 있었던 최고가의 크라이슬러를 몰고다닌 이승만의 희귀사진. 모 자동차 월간지. 해방이후 반민특위를 해체 친일파를 반공주의자로 만들고 친일파 최대 거두 인촌 김성수를 비롯한 그 친일매판세력 한민당과 손잡아 정부통령을 나누고 방응모의 친일 거두를 비롯 친일뿌리 조중동을 자유언론창달자로 변신시키고 모윤숙, 김활란 등 친일파를 교육가로 변신시킨자, 현행 헌법 전문에는 반 부패, 반무능, 반독재의 4.19정신을 계승한다했으니 이는 바로 반 이승만 정신의 4.19정신을 계승한다고 되어있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그는 일본이 물러나면서 남기고 간 전 국토의 70%귀속재산을 인촌 김성수의 한민당 친일파 위주로 분배해 오늘날 친일 경제 기득권층을 탄생하게 했고 정경유착의 뿌리가 된 용서못할 자이다. 그는 6.25때 보도연맹을 비롯 114만의 양민을 친일 밀정 김창룡을 특무대장(보안사령관)으로 삼아 학살한 살인마다. 역사에 무지한 못난 학자들이 그를 건국대통령이라 추켜 세우는데 이는 현행 헌법도 제대로 모르는 무지한 자가 아니라면 친일가정출신으로 조선일보 방우영 가문처럼 이승만에게 각골난망의 은혜를 입은자임에 틀림없다. 현행헌법에 대한민국정부는 김구의 상해 임정을 그 뿌리로 계승하고 있다고 되어있다.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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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 친일파 기독교도 이승만(李承晩)                    

1소극적 독립투쟁가로서, 권력 유지를 위해 친일파와 손을 잡음,정통파 무장항쟁주의 임정을 따돌리고 독립운동자금 인터셉트해 가로채고 임정허가없이 미국에서 임정공채를 팔아먹은 죄악, 임정 대통령사칭 임정에서 탄핵제명처분, 시세에 안맞는 외교론으로 미국의 종속을 미국무부에 청원(구미위원회 사건)( 안원전 21세기 담론, 통곡하는 민족혼)

2.해방후 임정의 한독당을 무력화시키고 미군정과 밀착한 친일 매판자본가 세력인 김성수의 한민당과 손을 잡고 일제가 물려준 적산재산 임의로 요리. 친일파를 반공주의자, 민족주의자, 교육가,자유 언론 창달자로 변신하는 면죄부를 주고 국가 유공자로 추서하여 국립묘지로 매장하게 하는 일방 자신과 등을 졌던 임정과 만주일대의 정통 무력항쟁주의 독립운동가 후손이나  해방이후의 정적에 대해 빨갱이로 몰아 처절하게 차도살해해 난도하고 그 과정에서 제주 4.3사태 및 여순 사건 만드는 단초를 만들어 민족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는 등 역사의 본질을 왜곡한 죄, 독립군을 토멸하던 관동군 친일 주구 헌병 보조원 출신인 김창룡을 특무대장(보안사 전신)으로 삼아 정적을 탄압 살해하고 보도연맹을 비롯 전국의 정적과 양민 113만 학살한 살인마,(2001년 한국일보,MBC 보도)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해 친일 잔재청산을 못하게 한 죄와 오히려 반민특위를 살해협박하고 정적들을 압살하고 빨갱이로 잔인하게 몰아 말살한 죄.( 안원전 21세기 담론)

3.북진통일을 주장하여 평화통일 주장자 정적 보수당 당수 조봉암을 빨갱이로 몰아 사법살인하고, 대남 적화통일을 가진 채 가뜩이나 경계심을 가지고 호심탐탐 노리던 북한 김일성을 부채질하여 판단착오를 일으키게 유도하여 6.25를 일으킨 촉매제 역할을 한 장본인.(맥아더 장군 자서전-안원전 21세기 담론)

4.수많은 부정부패독재의 모델인 자로,4번의 사항에 대해서는 4.19라는 철퇴를 받아 그 심판을 받아 현행 헌법에 반 부패, 반무능, 반 독재의 반 이승만 정신을 헌법정신에 아로새겼음에도 불구하고 상기 1,2,3 사항에 대한 역사적 심판은 아직 그대로 있는 민족사적 기소중지자로 그에 대한 역사적 심판 유보로 해방이후 58년간 친일 잔재청산과 역사의 날이 안서게 되었다.

5.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런 인격이 형편없는 이승만에게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도 팔아먹을 매국노라고 준엄하게 질타했다. 심지어 배재학당시절부터 이승만을 제자로 키운 바 있으며 비록 본인은 우리 애국가보다 미국국가를 먼저 부를 정도로(필라델피아 회의) 친미 사대주의자였던 서재필옹도 일기장에서  이승만의 미국생활에 대해 임정의 독립운동가와는 달리 고생은 커녕 호사만 일삼은 매국노라고 폄하비난한 자임.

6. 임정에서 단재와 함께 노선을 같이한 성균관대 초대 총장 심산 김창숙 선생은 미국에 가서 외국년 엉덩이만 실컷 두드리다 온 놈이 무슨 독립운동가인가. 그는 천하의 매국노이다라고 한 바 있을 정도로 욕심이 많았고 하와이 무장 독립운동가로 이승만과 싸우다 싸우다 지쳐 만주의 단재에게 달려간 김용만의 단체 돈을 사기해 먹으려다 김용만이 미친 매국노라 하여 멱살드잡이까지 한 바 있는 천하의 요주의 인물이었음.  

7.조선일보에서 툭하면 이승만을 추켜세우기 위해 이승만과 관련된 주변기사를 지속적으로 왜곡해 추켜세우기를 하는 일방 이승만의 매국적 행태는 쏙 빼놓고 미국에서의 외교적 독립운동이 청빈한 가운데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방응모는 친일매국노인데 이승만의 반민특위해체에 의해 처단되었어야 할 친일군상들이 오히려 반공주의자, 자유언론 창달자(동아,조선), 교육가(김성수,김활란) 등으로 변신하여 오히려 건국정부의 공로자로 둔갑하여 변신하게 해주었으므로 이승만의 공로가 하해와 같아 그 결초보은으로 조국과 민족혼을 기망하고 역사를 왜곡함.

사실 이승만의 외교론은 시세에 맞지 않은 것으로 베트콩에 의한 월남 패망을 보면 불사조같은 민족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월남은 미국과 한국 등의 세계최강의 우월한 화력을 베트콩 전법의 민족혼 하나로 물리쳤다.  이승만 처럼 외교를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더욱이 그 때는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가 아니었던가. 제국주의 약탈식민지 경쟁 속에서 약소민족의 주권을 찾는 것이나 민주주의 국가 틈바구니 속에서 공산혁명을 하는 것은 그 어렵기가 전혀 틀리지 않다. 카이로 회담의 조약에 한국독립에 대한  약속의 조문을 넣기로 장개석에게 약속을 받아낸 사람은 무장항쟁주의자 김구의 작품이지 당시 외교론자였던 이승만의 작품이 결코 아니다.
8. 해방이후 양자 방우영 일가의 손아귀에 넘어간 조선일보 반환소송중인
친일 매국노 일제하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의 친자 방제선씨는 부친의 친일행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이를 속죄하는 뜻에서 조선일보가 반환되면 국민주의 형태로 조선일보를 사회환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선일보는 일제하 친일노선을 걸은 과거의 행적을 미화하고 이승만 추켜세우기를 지속적으로 전개하여 반역사적 행각을 지속하고 있음.

9. 요즈음 일제치하에서 그 부모의 행적이 의심스러운 강위석이라는 자가 친일매국노에 대한 갖가지 기사와 여론에 항변하는 기사를 쓴 것을 중앙일보가 실어주어 네티즌, 독자들의 분노가 극을 달했다. 중앙일보가 그의 글을 실어 준 것은 강위석의 후안무치와 민족혼 왜곡도 왜곡이거니와 중앙 일보 담당기자의 정신상태도 지극히 불량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그것도 아니면 스스로 친일파로 지낸 가정사 비밀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일제 잔재청산을 못하여 상류층의 60-70%가 친일파인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을 반영하는 역겨움을 언제까지 보아야 하는지 참으로 딱하다. (이상 안원전21세기 담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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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책임은 대통령 후보였던 저에게 있습니다 지난 10월 30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최돈웅 100억' 관련 대국민사과 기자회견에서 머리숙여 인사하고 있다. 이 전 총재는 이 자리에서 "법적 책임을 포함한 모든 책임을 지겠으며, 검찰이 소환을 요구하면 피하지 않고 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마이뉴스 이종호

한나라당에 불법 대선자금의 거대한 핵폭풍이 본격적으로 몰아치고 있다. SK 비자금 100억원 유입사건보다 훨씬 규모가 큰 사건으로 보인다.검찰이 한나라당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씨의 최측근인 서정우 변호사를 수백 억원대의 불법 대선 자금을 거둔 혐의로 8일 긴급체포했다. 검찰은 서씨를 금명간 사법처리할 예정이라고 한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제 이회창씨에 대한 검찰의 직접 수사가 불가피하다. 검찰은 빠른 시일 내에 이회창씨를 소환 조사하고 이회창씨와 한나라당은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하여야 한다. 더 바람직한 것은 이회창씨는 검찰 소환통보 이전에 자진해서 검찰에 출두하는 것이다.

최종확인은 안됐지만 한나라당의 불법 대선 자금의 규모가 700억원에 달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최돈웅 의원의 SK 비자금 100억원은 한나라당의 불법 대선 자금의 일부라고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난 대선 당시 한나라당 핵심 지도부에 대한 수사 없이는, 더 직접적으로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후보의 진술 없이는 정확한 진상 규명이 될 수가 없다.

이번 사건이 더욱 충격적인 것은 '판사출신들의 공모'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회창씨나 서정우 변호사는 경기고·서울법대를 거쳐 판사로 재직하였다. 특히 이회창씨는 정치인이나 대선 후보이기에 앞서 대법관과 감사원장까지 지내며 '대쪽'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법과 원칙을 추상같이 집행해 온 사람이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우리 사회의 법과 도덕을 앞장서 지켜야 할 인사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천문학적 불법 자금을 거두고 뿌렸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일이다. 경기고-서울대법대-판사 출신들이, 우리사회의 '최고 엘리트'들이 이렇게 법을 어기고도 감옥에 가지 않는다면 일반 국민들 그 누가 법을 지키려고 하겠는가.

더군다나 이회창 후보는 97년 대선 때는 국세청을 동원해 불법 대선자금을 모금한 '세풍'사건으로 국민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는데, 2002년 대선에서도 또 어마어마한 불법을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고 있으니 너무 충격적인 일이다.

정치개혁은 모든 국민들의 염원이다. 노 대통령 측근비리 수사 특검은 철저히 측근비리를 파헤치고 검찰은 한나라당 대선자금 비리를 철저히 파헤쳐 이번만큼은 정경유착 부패를 뿌리째 들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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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암살의 주범 이승만- 안두희 입에서 쏟아진 이승만 연루설Click here!

권중희 선생은 안두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 "백범 선생님! 선생님의 예언대로 돌아가신 이듬해에 동족상잔의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치렀고 아직도 나라는 두 동강이 난 채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계셨더라면 당신의 몸으로 이런 비극만은 막아내셨을 겁니다. 아! 백범이시여…누가 이 나라를 구하겠습니까?"(효창동 백범 묘소에 참배하는 권중희씨)  

ⓒ2003 박도

안두희 입에서 쏟아진 이승만 연루설

어쨌든 그 날(1992년 9월 23일) 안두희의 자백은 크나큰 수확이었다. 마침내 암살지령 바로 윗선이며 직속 상관인 장은산 포병사령관 이름이 튀어나왔고, 묻지도 않은 <시역의 고민>을 대필했다는 얘기,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이 자기를 경무대로 데리고 가서 이승만 대통령의 치하까지 받게 했다는 얘기까지 털어놓았다.

안두희는 월남 후 서청에서 일하다가 1948년 11월 육사 8기 특3반으로 입교하여 3주간 제식훈련만 받고 포병 소위가 되었다. 1949년 4월 1일 경기도 광주에서 포병 창설 뒤 첫 사격대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도 왔다. 안두희는 그때 관측장교 상을 받은 바 있었다.

안두희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이랬다.

백범 암살 1주일 전인 1949년 6월 20일 무렵, 장은산 포병사령관이 안두희를 사령관실로 불렀다. 안 소위가 사령관실로 갔더니 장 사령관은 채병덕 육군참모총장 각하께서 안 소위를 부른다고 전했다.

안이 육본 지프차로 삼각지에 있는 참모총장실로 갔더니 신성모 국방장관도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다가 참모총장이 안두희에게 "경무대 구경 갈까?"했다.

그러자 신성모 국방장관이 "마침 나도 보고할 것이 있는데 같이 가자"했다. 나중에야 안두희는 그것이 사전에 짜놓은 각본임을 알았다고 나에게 말했다. 일개 육군소위를 이승만 대통령이 하찮은 일로 접견할 리가 있을 수 있나?

  

▲ 김구 선생과 이승만 대통령. 동시대의 인물로 대조적인 인생역정을 걸었다.  


경무대로 가니 미리 전화 연락이 된 듯 박 비서가 맞아주면서 곧바로 대통령 집무실로 안내했다. 신성모 국방장관이 "각하, 이번 사격대회에서 상을 받은 안두희 소위입니다"하고 소개하니까, 이 대통령이 안두희의 손을 잡으며 "국방장관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어. 높은 사람 시키는 대로 일 잘하고 말 잘 들어라"고 격려조로 말했다.

경무대를 나와서 곧장 부대로 직행하여 보고했더니, 장은산 사령관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그 봐, 내 말이 맞지?"하면서 엄지 손가락(대통령을 암시)을 세우면서 거사 후 모든 것을 보장할 테니 안심해도 된다고 회유를 했다.

안두희는 노회한 정객들의 하수인이 된 셈인데, 영웅심에 젖은 안은 "그 말이 그 말이지 뭐. 우리 정보하는 사람(안은 월남 후 한때 미군정 정보요원으로 활동했다)은 '척'하면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듣는다"고 그게 바로 이심전심의 화법이라고 했다.

암살 조직은 통상 점조직이며, 극비 지령은 암시나 이심전심의 화법으로 내리는 게 불문율이다. 그래야 증거를 인멸할 수 있고, 상황에 따라서는 오리발을 내밀 수 있다. 한마디로 이심전심의 화법은 암살 세계의 에이비씨다.

자백을 번복한 안두희

이튿날(1992년 9월 24일) 안두희는 우당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날 밝힌 사실들을 번복하면서 "권중희의 강압에 의한 허위 자백"이라고 생떼를 썼다. 그런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몇몇 신문들은 안두희를 변호하며 나를 공박했다. 안두희가 증언을 번복하게 된 내막이나 자백의 진위 여부를 가려내 확인 취재할 생각보다 안두희 말만 대서특필했다.

하지만 나는 1992년 9월 23일 안두희가 나에게 털어놓은 자백만은 진실에 가깝다고 확신한다. 그 첫째로는 안이 입을 연 후로는 일체 위해를 가하지 않았고 자유스런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 둘째는 내가 묻지도 않은 <시역의 고민> 대필이나 경무대 방문을 안두희는 아주 자세하게 밝혔다.

경무대에서 무슨 차를 마셨느냐고 묻자, 안은 주스를 마셨다고 했다. 수십 년 전 일을 어떻게 자세히 기억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커피를 좋아하는데, 별로 좋아하지 않는 주스가 나와서 똑똑히 기억한다고 했다.

안이 제 입으로 털어놓은 사실을 번복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엄존하는 보이지 않는 무서운 세력을 의식해서 더러운 제 목숨을 잇고자 발버둥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암살 배후자는 자기들 정체가 드러날 듯하면 가차없이 암살자를 처치해 버리는데 그것이 그네들 세계다.

나는 10여년 간에 걸쳐 안두희를 때리고 강제 연행한 것을 부인치 않는다. 이미 그에 대한 처벌도 달게 받았고, 그 어떠한 비난도 감수하겠다. 내가 그를 못살게 군 것은 대낮에 독립지도자를 죽인 반역범이 진실을 털어놓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우국충정에서 살해했다면서 애국자인 양 활개치며 살고 있는 꼴을 볼 수 없어서 모든 것을 각오하고 그를 응징했던 것이다.

일제시대에 일본에 붙어서 독립군을 살해한 밀정을 몽둥이찜질을 했다면 그것도 폭행죄가 되는가? 안두희는 그 밀정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제대로 된 나라였다면 안두희와 같은 반역범은 이미 오래 전에 능지처참했을 것이다.

내 마지막 소원은

내가 송추에 살고 있을 때, 어느 날 박기서씨가 찾아왔다. 그는 나에게 후세에 부끄럽지 않게 안두희가 천수를 누리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며 살해할 뜻을 내비쳤다. 그래서 나는 그 일만은 극구 만류했다.

아직은 더 밝힐 게 있다. 안두희 추적으로 내 인생은 깨질 대로 깨졌다. 이제는 더 이상 깨질 것도 없다. 그러니 죽여도 내가 죽일 것이라고 했는데 기어이 박기서씨가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안두희 살인 사건 후 검찰에 불려갔다. 담당 검사가 나에게 살인교사 혐의를 묻기에 "그것은 나와 박기서씨의 인격을 모독한 것이다. 내가 할 일을 박기서씨에게 빼앗겼을 뿐이다. 비겁하게 이 권중희가 박기서씨를 충동질할 리 없고, 그 충동질에 놀아나서 살인할 박기서씨도 아니다"라고 했더니 더는 문제 삼지 않았다.

  

▲ "단 하루라도 민족정기가 바로 선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권중희씨  

ⓒ2003 박도
내가 마무리 짓지 못하고 박씨가 교도소에 가게 되어 늘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안두희가 제 명대로 천수를 다 누리고 죽었다면 '칠천만 우리 민족의 수치'라고 그때도 지금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암살자가 활개치는 세상만은 막아야

12년 동안 안두희를 추적했던 이야기가 끝났다. 그새 네댓 시간이 흘러갔다. 어찌나 실감나게 얘기하시는지 마치 007 시리즈를 한 편 본 듯했다.

마무리 말씀을 부탁드리자 돈이 마련되면 영어를 잘 하는 사람과 동행해서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가서 한 달 정도 머물면서 1945년 8월 15일 해방부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때까지 한국 관계 비밀문서를 죄다 열람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 백범 선생의 암살에 관한 얘기가 어딘가에서 나올 것이라면서 그게 당신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다.

왕복 비행기 삯과 체류비를 포함하여 2천~3천만원 정도면 충분할 텐데 기업인들이 정치인에게는 사과상자에다 현찰로 수십억씩 갖다 바치지만, 자신 같은 이에게 백범 선생 암살 배후를 밝히라고 단돈 10만원이라도 주겠느냐면서 로또 복권이라도 한 번 사보고 싶다고 했다.

정치 지도자들이 진정한 애국과 겨레사랑의 길은 외면한 채 어리석은 백성들만 속여 등쳐 먹고 있다면서, 정치인 중에 백범 암살 배후만 시원히 밝혀도 후세에 큰 이름을 남길 텐데 그런 일에는 관심을 갖는 이가 없다면서 권 선생은 이런 현실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다시는 이 땅에 안두희와 같은 암살자가 나타나지 않아야 하고, 그런 암살자가 활개치고 사는 세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끝 말씀으로 마무리하시면서 긴 대담을 마쳤다.


내가 <의를 좇는 사람>을 쓰는 이유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것도, 이만큼 민주화된 것도, 이만큼의 자유와 인권 신장이 된 것도,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로 여기던 남북의 정상이 만난 것도, 금강산 뱃길이 열리고 경의선 끊어진 철로가 이어지고 금강산 가는 육로 길이 열린 것도, 교실에서 북에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눈치 보지 않고 가르칠 수 있는 것도,

모두가 다 조국 해방을 위해, 통일을 위해, 민주화를 위해 피를 흘리고 그 제단에 목숨을 바친 독립전사와 선열과 민주 투사들의 숭고한 희생 덕분이다.

씨앗을 뿌린 자가 그 열매를 거두는 곳이 정의로운 사회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 언제부터인가 씨앗을 뿌린 자와 그 열매을 거둔 자가 달랐다. 엉뚱한 자가, 오히려 씨앗을 뿌린 자를 방해한 자가 열매를 거두어 갔다.

나는 글을 쓰는 이로서 씨앗을 뿌린 자에게 그 열매를 가져다 줄 능력은 없다. 하지만 언 땅에 씨앗을 뿌리다가 숨져간 거룩한 영령들의 한을 들어주고, 그 유족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은 할 수 있다는 소명감으로 <의를 좇는 사람>이란 주제로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듣고 그 사연을 많은 이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붙이는 말: 이 연재기사에 대한 정보 제보나 자료제공, 그리고 추천할 인물이 있으면 '쪽지 보내기'나 필자의 메일로 연락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 박도  





출처 : 아무거나
글쓴이 : 라벤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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