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1. 5. 22:41ㆍ진실
[금지를 금지하라](23)자기 치부는 은폐, 정적은 불법 사찰..추악한 권력의 두 얼굴 [경향신문] ㆍ사생활, 은폐와 사찰 사이 1979년 11월7일 공개된 ‘10·26사건’의 현장검증 장면. 차지철 경호실장을 향해 권총 한 발을 쏜 김재규가 앞에 앉아 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쏘는 모습을 재연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0·26사태에 대한 군사재판에서 피고인 김재규는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성호의 변론 일부를 제지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막으려 한 변론 내용은 ‘대통령의 사생활’ 부분이었다. 박성호의 변호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부도덕과 타락을 추궁하고 있었다. 권력자의 문란한 사생활이 부각될수록 ‘10·26거사’의 명분이 확보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박성호는 반대신문 과정에서 사건 당일 오후 네 시경 프라자 호텔에 간 사실을 시인하기도 했다. 그날 밤 연회에 참석할 여성을 데리러 간 것이다. 그런데 김재규가 자기 부하의 관련 진술을 막아버렸다. 알려진 대로 김재규는 박정희 살해의 동기를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이라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는 재판 과정에서 유신체제나 박 대통령의 영구집권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던 차였다 (김재규 군사재판-변호인 박정희 사생활 공개시도, 동아일보 1993·11·18). 하지만 대통령의 사생활에 관해선 일절 함구했다. 박정희의 명예를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한때나마 자신이 봉사(?)했던 정권의 치부만은 감추고 싶었던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거사가 가십화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던 것일까? 1979년 10월26일은 박정희 대통령이 저격당한 날로 기억된다. 하지만 이날은 소문만 무성하던 대통령의 사생활이 노출돼 버린 날이기도 했다. 당시 연회에는 대통령과 중정의 간부들만 참석한 것이 아니었다. 연회를 도울 여성들도 함께했다. 이 여성들은 군사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하기도 한다. 합동수사본부는 이들의 신원이 노출되지 않도록 철통 보안을 했다. 언론의 사진 게재도 뒷모습만 허용했고, 이름은 가명을 쓰게 했다. 증인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한 당연한 처사였다. 하지만 합수부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성들 보호보다 대통령의 사생활을 감추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분명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대한민국 헌법 제17조). 그렇다면 대통령의 사생활은 어떠할까? 대통령과 정치인의 사생활은 소문과 가십, 음모론의 핵심 요소가 되곤 한다. 이는 권력자들의 사적 영역이야말로 정치의 가장 은밀한 무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함의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유신체제가 궁정동 안가에서 종식된 것도 이를 상징하는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의 사생활은 감추어질 수만은 없는 정치 쟁투의 오랜 요소인 것이다. 국가권력은 사생활의 문제에 접근하는 두 가지 상반된 양태를 보인다. 권력자들의 정치비리를 사생활이라는 명분으로 은폐하면서, 한편으론 권력유지에 반하는 자들의 사생활을 사찰하는 것이다. 사생활이라는 정치 프레임은 이렇게 ‘은폐’와 ‘사찰’의 사이(間)에서 발생한다. 다시 말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 자체를 의문케 하는 정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 대통령의 사생활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청와대 미스터 정이라고 말하겠어요/ 나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우리만 알았을 걸/ 죽고 보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소.” 정인숙 피살사건(1970)을 풍자한 노랫말이다. 나훈아의 히트곡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개사한 이 노래는 정인숙이 피살된 지 두 달 만에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신민당 조윤형 의원에 의해 읊어지기도 했다. 정인숙의 수첩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 정일권 국무총리,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박중규 대통령 경호실장 등 정·재계 인사 27명의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그녀의 죽음이 ‘정치 스캔들’로 비화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언론을 통제했다. 국회 본회의에서 이 사건 언급을 하지 말아달라며 야당과 협상하기도 했다. 또 1년 뒤인 1971년 대선 정국에서는 정인숙 사건이 정치흥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에게 신변안전 보장을 대가로 정인숙 사건을 유세과정에서 들추지 말라는 거래를 제안했다. 당시 김대중 후보는 ‘정책대결의 선거전’을 주장했기에 인신비방은 안 하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강제된 밀약은 이렇게 가능했다(남산의 부장들-정인숙 사건 극비 흥정, 동아일보 1991·3·1). 하지만 대통령과 정권 인사들의 여성 편력과 사생활에 관한 소문은 연일 확산됐다. ‘대통령과 어느 여배우의 염문설’ ‘대통령의 여염집 방문 목격담’ 등이 횡행한 것이다. 1981년에는 서울민사지법에 한 주부가 경찰관을 상대로 갈취당한 돈의 반환청구소송을 내기도 했다. 그 주부는 승강기에서 박 대통령을 목격했고, 즉각 경호원들로부터 발설하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참지 못해 소문을 냈고, 문제의 경관이 이를 눈감아주는 조건으로 돈을 갈취했다는 것이다(박 대통령의 깊은 밤 깊은 곳, 동아일보 1991·2·22). 이처럼 박정희 정권 시절 내내 대통령의 사생활에 관한 ‘뒷말’이 계속됐다. 그럴수록 정권 수뇌부는 이를 은폐하기 위해 온갖 시도를 했다. 협박과 회유, 협상과 거래가 물밑에서 이뤄졌다. 정권 유지의 정당성은 권력자들의 문란한 사생활을 은폐함으로써만 비로소 확보될 수 있었다. 가장 은밀하면서도 치밀한 정치협상이 사적 영역이란 장소에서 암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의 사생활 문제는 박정희 정권의 권력형 비리를 감추는 과정에서 본격 제기됐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의 딸이자, 그의 정치적 상속자인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부터 다시 사생활 문제가 정치 이슈로 제기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만하다. 박 전 대통령의 변호를 맡은 유영하 변호사는 ‘세월호 7시간’ 관련 검찰조사 기자회견에서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달라는 발언을 했다. 이는 ‘사생활 보호’라는 명분을 통해 대통령에 대한 동정여론을 조성하려는 시도였을 게다. 아울러 ‘여성’에 대한 강조는 그의 발언·발상이 한국 사회에 만연한 ‘여혐’ 정서에 침윤되거나 기대고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란 사실도 확인해준다. 주지하듯 박 전 대통령의 감춰진 세월호 참사 당일 행적은 ‘미용시술설’ ‘염문설’ ‘사이비 종교설’ 등의 루머를 양산했다. 이러한 루머로 시민사회의 불안이 고조되고, 사회적인 피로가 누적된 것은 보상받지 못할 중대한 손실이었다. 그럼에도 ‘세월호 7시간’의 행적은 여전히 감춰져 있다. 세월호 참사 당일 청와대 관련 기록들이 대통령 지정기록물로 처리돼 30년 동안 봉인됐다. 청와대는 비공개 사유로 대통령기록물법 17조를 들었다. 해당 조항은 국가안전보장에 중대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거나 사생활에 관한 기록에 대해 대통령이 보호기간을 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즉 30년 봉인이 가능한 것은 ‘세월호 7시간’의 행적을 대통령의 사생활 문제로 처리했기 때문인 것이다. 아마 이 기록이 공개되기 전까지는 대통령의 사생활은 정치적인 쟁점으로 남을 것이다. 대통령의 (더 이상 사적이지 않은) 사생활이 국민의 생명(권)과 알권리, 무고한 희생을 둘러싼 치열한 전장이 된 것이다. ■ 민간인 불법 사찰의 역사 국가권력은 정당성 확보를 위해 권력자들의 부정한 사생활을 은폐한다. 반면 권력 유지에 반하거나 반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잠재된 적(敵)’은 사찰을 서슴지 않는다. 물론 사찰과정에서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묵살되거나 감시의 대상이 될 뿐이다. 권력이 있는 곳엔 언제나 감청이 있었다. 민간인 불법 사찰은 한국 정치의 가장 아픈 ‘흑역사’이다. 직선제로 선출된 노태우 대통령은 부임한 지 2년 만에 중대한 정치적 위기를 맞는다. 국군보안사령부의 민간인 불법 사찰(1990)이 폭로된 것이다. 사찰 대상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을 비롯한 여야 정치인은 물론 학계, 종교계, 언론계, 문화예술계, 노동계 등 사회 전반에 걸쳐 1300여명에 이르고 있다. 사찰 대상자의 개인 신상카드에는 인적사항, 가족사항, 경력, 전과, 자격면허, 해외여행, 정당 및 사회단체 활동, 교우, 배후인물, 개인 특성 등이 상세히 기록됐고, 집의 담장 높이, 예상도주로, 은신처까지도 파악돼 있었다. 택시 안에서 나눈 대화가 들어있는가 하면 ‘도청’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전화통화 내용까지 있어 국민들을 경악하게 했다(택시·대화내용까지 엿들어, 한겨레 1990·10·7). 보안사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은 전국적인 규탄 집회로 이어졌다. 시민사회의 거대한 저항이 일어났고, 사찰 대상자 1300여명도 위자료 소송을 냈다(사찰대상자 국가 상대 위자료 소송, 동아일보 1990·10·24). 이에 노태우 정권은 사회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범죄와의 전쟁’을 급조해 선포했지만 시민들의 분노는 쉽게 꺼지지 않았다. 보안사 사찰 파문 이후에도 불과 1년이 지난 시점에 기무사(구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사건(1991)이 다시 불거져 사회적 공분을 샀으며, 교원사찰, 우편물 검열 등도 문제가 됐다. 정보기관에서는 사찰에 대해 ‘군을 보호하기 위해 군 관련 간첩과 좌익사범 수사에 참고’하기 위함이며, 유사시 ‘북한의 통일전선 공작에 이용될 가능성이 높은 대상자에 대한 관리’라는 변명으로 일관했다. 사회적으로 형성된 레드 콤플렉스를 기반으로 한 권력 유지에 반할 가능성이 있는 자 모두를 ‘반체제 인사’ ‘극렬분자’로 낙인찍어 감시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찰 문제가 불거질수록 사생활의 자유와 개인의 프라이버시권에 대한 성찰의 수준이 심화됐고 이를 민주주의 사회 정착의 지표로 여기는 인식이 형성됐다(사생활 자유 침해, 한겨레 1991·11·15). 그렇다면 현재는 어떠할까? 민간인 불법 사찰 파문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이 공무원이 아닌 민간인을 사찰해 충격을 줬고,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이나 댓글 사건 및 블랙리스트 작성 파문이 이어져 사회적인 지탄을 받았다. 과연 한국 사회에서 개인에게 사생활이라는 것이 존재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본래 공과 사의 구분은 무엇으로도 쪼개질 수 없는 개인(individualism)에 대한 의식을 전제로 한 것인데, 우리의 역사에서 ‘개인의 자유’란 것이 과연 허락된 적이 있었는가를 반성적으로 되물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간인 불법 사찰이라는 한국 정치의 ‘흑역사’를 바로잡는 일은 이 사회에서 개인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 촛불을 기억하며 촛불집회가 벌써 1주년을 맞았다. 그때의 기억을 돌아보면, 정말 지난한 저항의 시절을 보냈다는 생각이 든다. 거대 규모의 집회가 계속됐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계속됐다’는 감각은 집회나 시위가 ‘고유한 장소’와 ‘정해진 시간’으로부터 이탈하고 있다는 그 ‘일상성’으로부터 감지된다. 국가의 ‘공적 의제’가 ‘일상의 과제’와 겹쳐지면서, 공과 사의 구분 자체를 의문시하는 대중의 정치가 등장한 것이다. 우리의 저항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사생활의 영역은 언제나 정치의 전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공과 사의 구분을 사유케 하는 정치는 대중의 집단적 저항에 의해서도, 국가의 공권력 남용을 통해서도 등장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 이 둘은 질적으로 전혀 다르다. 차라리 사생활을 은폐하거나 사찰하는 국가권력의 행위에는 정치라기보다는 ‘치안’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부턴 권력자들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시민들의 공개적인 사찰이 필요한 것 아닐까 싶다. 그 누구에게도 쉽게 ‘통치받지 않으려는 기술’은 바로 이러한 촛불의 경험을 간직하고 실천할 때 영속적으로 확보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 허민 한국 근대문학·문화론을 연구한다. 주요 평론으로 <당신들은 읽지 마세요: 적이 없는 시대의 문학과 비평> <블랙리스트와 서명의 정치> 등이, 공저로 <내가 연애를 못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인문학 탓이야>(2014), <흙흙청춘>(2016) 등이 있다. <허민 | 문화연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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