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교과서: 잠이 안 오네

2011. 6. 27. 01:36시사

근현대사 교과서: 잠이 안 오네
역사, 현재, 미래 2009/08/12 21:13   http://blog.hani.co.kr/nocon/30627
아내의 친한 친구가 강남에 산다. 며칠 전에 그 집을 방문하였다가 마침  그 집 아들이 현재 고3 대입 수험생이고, 또한 한국근현대사를 선택하여 수능 준비를 하고 있다기에, 근현대사 교과서와 관련 참고서를 대략 훎어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굳이 고3 아이를 불러 교과서와 참고서를 보자고 한 이유는 바로 최근에 일었던 국사교과서 파동에 대한 기억이 지금도 내 머리에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논란이 일던 당시에 바로 교과서 몇 종을 입수하여 살폈으면 좋았겠지만, 그때는 내가 다른 일로 정신이 없던 터라 그냥 흐지부지 지나고 말았다. 그러니 국사 교과서 논쟁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싶어도, 나는 실물을 보지 않은 상태라 입을 쉽게 열 수 없었다. 그저 신문기사를 통한 눈동냥으로 몇 가지 쟁점들만 알 뿐이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직접 실물을 보게 된 셈이다. 그런데 실물을 훑어본 나의 소감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내지는 "이거 정말 큰일이네."와 같은 말로 요역할 수 있겠다.
 
무엇이 심하며, 무엇이 큰일인가? 좌파적 민족주의 경향이 농후한 현행 교과서가 큰일일까, 아니면 극우적 경제지상주의 경향이 짙은 뉴라이트의 개정 교과서가 큰일일까? 나의 느낌은 이런 이분법적 양단논리가 아니었다. 내가 느낀 것은 "제3의 우려"였다.
 
현재 고3 학생들이 공부하는 근현대사 교과서는 크게 3개 단원으로 나뉘어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1) 나라가 망하는 1910년 이전의 개항기(1976-1905) 및 개항 직전의 배경 설명, (2) 식민지 경험(1905-1945)과 독립운동, 그리고 (3) 현대 한국의 발전(1945-2002) 등 세 개의 큰 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내가 주목한 것은 두 번째 단원인 식민지 시대였다. 왜냐하면 요즘 큰 화두가 되고 있는 "식민지 근대화론" 문제와 직결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역시 예상대로, 이 단원은 "식민지 근대화론"의 대척점에 있는 "식민지 수탈론"과 그에 상응하는 처절한 독립운동사로 뒤덮여 있었다. 약 30년 전에 내가 배운 국사의 내용도 바로 그랬었고, 20년 전 고등학교 국사 선생으로서 내가 가르친 내용도 바로 그랬었고, 이제 오랜만에 다시 본 내용도 바로 그때의 시각 그대로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독립군들의 이야기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상세하게 나오는 점 및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독립운동이 비교적 사실에 맞게, 형평에 맞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20여년 전에 이미 학계에서는 사실상 종말을 고한 내용들이 여전히 큰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를테면, 1910년대 총독부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으로 조선 농민들이 토지를 대거 상실했다는 식의 설명도 그 가운데 하나다. 상당수의 조선인 지주들은 1929년 대공황의 뒤를 이어 1930년대에 조선을 강타한 농업공황으로 파산 위기에 몰렸고, 그 결과로 하는 수 없이 토지를 헐값에 일본인 대지주/자본가들에게 넘기거나, 아예 일본 은행에 차압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1940년에 이르러서는, 10년 전에 비해 인종별 지주 비율에 현격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1910년대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하여 토지를 빼앗긴 조선인 지주는 거의 없었다. 이런 얘기는 이미오래 전부터  국내외 학계의 통설이요, 정설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일제가 조선의 토지를 빼앗은 방법 때문이다. 즉, 일제는 무식하게 촣칼로 조선인의 토지를 뺏은 것이 아니라, 대공황을 맞아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매우 자연스럽게 먹었던 것이다. 마치 지난 IMF 때 경제위기를 이용하여 외국 자본가들이 한국의 경제기반을 거의 날로 먹다시피 한 것과 유사하다.  그들은 총 한 방 쏘지 않은 채, 그저 자본주의 논리를 한국에 적용함으로써 매우 자연스럽게 먹었던 것이다. 
 
일제가 조선을 지배한 방법도 그랬다. 총칼로 무식하게 수탈한 게 아니라, 그저 자본주의 시장논리를 조선사회에 그대로 덮어씌움으로써, 매우 자연스럽게,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교묘하고도 고차원적으로 수탈하였던 것이다. "수탈론"을 말하려면 이런 걸 말해야 한다. 이는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사실의 문제가 된 지 오래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봐 줄 만 하다. 내가 정말 큰일이라고 느낀 이유는 한국의 식민지시대(20세기 전반)를 배워주는 단원에서 20세기 전반의 국제 정세와 경제상황을 거의 설명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어떤 원리에 의해 작동되고 있었는지, 그것이 왜 문제가 되어 1차, 2차 세계대전으로 폭발되었는지, 이 와중에 일본의 국제적 위상은 어떠하였는지,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 있던 일본의 국내 정세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는지 등등, 조선의 식민지 시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도저히 빠뜨리면 안 되는 내용들이 거의 빠져 있다.
 
그 대신, 거의 모든 내용은 모조리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액션으로만 채워져 있다. 이른바 수탈과 궁핍, 지배와 저항으로만 짜여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당시 식민지 시기를 살았던 조선인들의 근시안적 시각이 근 100년이 가까워 오는 지금도 한 치의 변화 없이 그대로 계승되어, 21세기를 살아갈 청소년들에게 대물림되고 있는 것이다.
 
축구 경기에 비유하자면, 축구장 전체의 흐름은 잘 모르면서 그저 자기 편 골대 앞의 상황에만 시각을 고정하고 몰입하는 태도와 같다. 90분 동안 자기편 골키퍼만 바라본 그런 사람이 그 축구경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평할 수 있을까? 역사로 비유하자면,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을 공부한다면서, 당나라는 쏙 빼고 신라의 역할만 강조하는 셈이다.  현대사로 비유하자면, 한미관계 내지는 미국의 역할을 빼고 대한민국 역사를  논하는 셈이다. 모두 어불성설이다.
 
이런 식의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세계 무대에 올라 어떻게 숲을 논할 수 있을까? 숲은 보지 않으면서 특정 나무 한 그루에만 전력을 쏟아 달달 외운 꼴이니 하는 말이다. 자기가 공부한 그 나무가 속해 있는 숲 전체에 대한 이해와 설명 없이, 어떻게 그 나무를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고도 자기는 다 안다고 믿을 테니, 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이런 식의 자기중심적/근시안적 역사 시각과 교육은 한국사에 이미 몇 번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국수주의적 편협한 시각을 들 수 있겠고, 그와 쌍벽을 이루는 것으로는 극단적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북한의 현실을 꼽을 수 있다. 자기 주변, 더 나아가 이 지구상의 국제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는 관심이 없이, 그저 자기 생각만으로 살아간 대표적인 예들이다. 그 종말은 대개 뻔했고, 또한 뻔하다.
 
그러니, 대개는 과대망상이나 피해망상 증세를 가진 채 세계로 나가는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 세계사를 전혀 모른 채 국제무대에 나서는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 국사를 조금은 알되, 세계사의 한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마치 주체사상에 버금갈 정도의 한쪽 시각으로만 알고 국제무대에 오르는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 그래서 한국이 마치 미국이나 일본과 대등한 나라인 것처럼 알고 국제무대를 밟는 요즘 젊은이들... 자신감과 과대망상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
 
청나라를 오랑캐로 매도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로부터 배울 것을 주장한 북학론자들을 실학이라는 이름으로 크게 추켜세우지만, 정작 자신은 외국으로부터 전혀 배우려 하지 않는 요즘 이땅의 한국사 전공자들... 그들이 쓴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그 대안이라고 나온 뉴라이트 교과서는 더 가관이고...
 
ㅠㅠ 그래서 잠이 잘 안 온다.
 

  원문 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7102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