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세월호,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

2014. 6. 2. 19:16진실

  “그냥 이거 다 먹고 죽어버릴까 싶어요.  난 딸린 가족도 없이 혼자니까 고민할 것도 없구요.  홀가분해요.  내가 죽으면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한테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외출 중에 술을 마시고 온 그를 타박하는 병동 간호사에게 그가 이제껏 먹지 않고 모아둔 수면제 알약봉투를 들고 흔들며 체념하듯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날 야간근무 간호사들은 그 때문에 초긴장 상태에서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고, 병동 수간호사는 다음날 아침 제게 달려와 상황을 설명하고 대책을 요구했습니다.  저 역시, 이것이 자살을 생각하는 우울증의 명백한 전조증상인지 고민하며 진료실로 그를 불러 면담을 하고 현재 받고 있는 정신과 치료에의 추가협진 및 병동생활에 있어 환경조절을 지시하며 한동안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몇몇의 사람들과 함께 우리 병원에 입원한 날은 세월호의 참사가 벌어진 바로 다음날이었습니다.  그는 기울어진 배 안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는 학생을 받다가 함께 밀리며 난간같은 구조물에 등을 부딫혔다고 했습니다.  그로 인해 발생한 통증은 폐의 충격을 동반한 갈비뼈의 골절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제가 치료해 주어야 할 환자가 되었습니다.

  회진때마다 그는 세월호 관련 특보가 나오고 있는 텔레비젼 화면을 주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등부위의 통증이야 어차피 복대로 보조하며 기다리면 좋아지는 것이라 크게 신경쓰지 않았지만, 그는 종종 ‘잠이 잘 안온다.’, ‘맘이 잘 안정되지 않고 때로 놀라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는 증상을 호소하였습니다.  외상후 정신적 트라우마 때문이거나 환경이 갑자기 변해서 그럴 수도 있다는 말로 다독이긴 했지만, 제가 정신과 전문의는 아니기에 자세하게 설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죠.  다행히 병원 자체에서 세월호 생존자들을 위한 정신과 면담과 치료를 추진하여, 그 이후로는 정신과적 관련증상에 대해서 저는 조금이나마 부담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한 달이 지나도록 퇴원이야기가 없었습니다.  보통의 경우, 갈비뼈 골절 환자들에겐 한달 이내의 적당한 시기가 되면 ‘퇴원하여 바깥환경에 적응해서 움직여보는 것도 치료의 한 방법이다.’라 설명하며 퇴원을 권유하지만, 그에겐 워낙 엄청난 참사의 트라우마와 이런저런 행정적 복잡함과 더불어 정신과적 치료의 과정에도 있었기에 일부러 퇴원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갈비뼈 골절관련한 증상이야 많이 좋아졌기에 그가 스스로 퇴원을 생각할 시기도 되었다 싶었지만, 그는 마치 눌러앉기로 작정한 듯, 퇴원이야기도 없이 조용히 누워있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외출다녀온 어느날 늦은 저녁에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름의 괴로운 심경을 토로했던 것입니다.

  그는 화물차 소유의 자가운전자였습니다.  1억 4천짜리 화물트럭은 5년 만기에 이제 겨우 석 달의 할부금을 납부한 상태였고, 그는 지입형태의 1인 사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딘가에 소속되어야 하기에 회사에 ‘넘버값’만 지불하며 아무런 보호대책 없이 화물차 운송사업을 하는 입장인 것이죠.  퀵서비스 노동자가 실은 1인 사장의 입장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새 거나 다름없는 화물차를 세월호에 승선시켜 제주로 오다가 바다에 수장시키는 변을 당한 것입니다.  ‘넘버값’을 지불하는 회사는 사실상 회사-직원 간의 관계가 아니기도 하거니와, 배에 실은 화물차는 차가 아닌 ‘선적된 화물‘이기에 회사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합니다.  어처구니 없는 사실은 ‘선적된 화물’인 화물차는 세월호를 운영하는 회사에서 화물관련 책임과 보상을 해야 하지만, 청해진 해운은 화물보험에 가입되어 있지도 않았던 데다 현재 파산 신청 중에 있기에 손실 보상 여부가 매우 불투명한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쏟아 부은 유일한 생계를 바다에 수장시킨 채, 이렇다 저렇다 할 대책도 없이 우두커니 병실에 앉아 희생당한 300여명의 시신이 하나하나 수습되는 모습만을 텔레비젼을 통해 한달 내내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에게 아무런 지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사는 지역 시에서는 중소기업 자금지원의 형태로 저금리로 돈을 빌려주겠다는 제안은 있었다고 합니다.  정부의 대책이라는 것도 있었죠.  생활 안정 자금이라고 해서 -그의 말에 의하면- 해수부 차원에서 당사자에겐 80만원과 직계가족 1인당 40만원의 지원금을 3개월간 지급하겠다고 했고, 지역 시 차원에서도 이보다는 적지만 비슷한 지원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황당한 건, 이 금액은 희생자들 가족에 해당되는 금액이고, 생존자들은 ‘일할 능력이 있으니‘ 50%만 지급하겠다고 했답니다.  생각해보면 참 어처구니 없는 지원입니다.  생계의 모든 걸 털어넣어 마련했을 1억이 넘는 생계수단을 잃어버린 그에게 다시 빚을 지라는 제안이나, 계산해보면 최저생계수단이나 될까 싶은 액수로 ‘당신은 일할 수 있으니 이 정도 금액으로도 지원은 충분하다’라며 정부가 던지는 제안은 상식적으로도 자괴감만 더욱 조장하는 꼴일 뿐입니다.  실제로 그는, 이러저러한 제안이나 지원에 대해 아무런 자극도 받지 못했고 더불어 자신이 가입한 사보험에서 나오는, 입원일수에 비례하여 나오는 보험지급금이라도 더 타볼까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입원한 한 달 이상의 시간동안, 그는 기다렸고  그에게 다가온 제안은 이렇듯 어처구니 없는 사탕발림, 임기응변 그 자체였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던 그가 제게 한숨을 더하며 말을 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병원에 언제까지 버티고 있겠습니까.  나가야죠.  나가서 일해야죠.  그런데 생계가 너무 막막하니 나가서 뭘 어떻게 해야할 지를 모르겠습니다.  화물트럭을 다시 몰게 된다 하더라도 -이번 트라우마때문에- 제가 배를 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한 번 타보고 타지면 괜찮겠지만, 도저히 못 타겠다면... 그 땐..  다른 일을 알아봐야겠죠.  그래서 더 막연해요..  그러다보니, 아직까지는 불투명하지만 나라에서나 청해진해운에서 나올지 모르는 보상에도 신경이 가지 않을 수 없어요.’

  골절과 관련한 그의 증상이 많이 좋아졌음은 주치의의 판단으로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가 아직 정신과 치료를 받고는 있지만 굳이 입원상태에서 받아야 할 상태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 아직 그에게 퇴원을 종용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가족도 없고 밖으로는 아무런 대책없는 그에게 지금의 병실은 그가 당장 짜낼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이자 위안과 의지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조용히, 그가 병원과 주치의인 저를 난처한 상황에 빠뜨리지 않는 선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병원문을 나설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그에게나 저에게나 현실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 중에 있습니다. 

  300여명의 안타까운 목숨이 충분한 구조의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수장당하는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어야 했습니다.  구조에 전력을 다해야 할 공권력은 민간업체와의 이해관계와 더불어 알 수 없는 이유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 나라의 정부를 구성하는 관료들과 조직들은 서로의 책임은 회피하며 세월호의 실소유주인 청해진해운과 세모그룹 일가를 붙잡아 족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 나라 국민들의 허탈과 우울은 한달이라는 긴 시간동안 방치된 채, 결국엔 -누군가의 표현에 의하면- 최고통수권자의 ‘눈물같은 닭똥’으로 무마시키려 했습니다.  같은 시간동안, 우리는 안타까운 목숨들이 차갑게 불어버린 시신으로 하나하나 건져올려지는 모습을 보아야 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살아남았다는 죄로 살아있음에의 위로도 생계에의 대책이나 지원도 없이 방치되어야만 했습니다.  생을 잃어버린 자들이나 생을 유지하는 자들이나 이래저래 괴롭고 힘들기만 한 세상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나라에 열심히 세금을 내며 살고 있습니다.  

     

          

출처 : 칼을 벼리다.
글쓴이 : 민욱아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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