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70주년≫ 일제의 만행

2015. 8. 14. 21:59진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바쳐 혼신을 다 하고도

친일 매국노들에게 해방된 조국을 찬탈당하여

귀국하지 못하고 통탄하며 이국땅을 해매이다 운명을 달리한

수많은 독립 애국지사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중동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는 IS의 원조라고 볼수있는 일본의 잔혹한 만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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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뜨겁게 품었던, 젊은 그들을 기억하라!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잊혀진 항일혁명가 김찬과 中 명문가 출신 아내 도개손의 평전

항일 투쟁과 혁명동지로 활동하다, 함께 처형당한 불꽃같은 삶 그려

 

랑할 때와 죽을 때·원희복 지음 공명 발행ㆍ320쪽ㆍ1만 7,000원

   


●'날개옷을 찾아서'

한국 최초 여성비행사 권기옥 평전, 3·1 운동으로 6개월 옥고 치른 후

독립운동 위해 中 항공학교에 입학… 해방 후 공군 창설 주도하기도

날개옷을 찾아서·정혜주 지음 하늘자연 발행ㆍ322쪽ㆍ1만5,000원



  ●'민들레의 비상'

여성광복군 지복영 회고록, 광복군 사령관 지청천 장군의 딸

독립투사 가족들의 고난 생생, 독립 다짐하던 동포들 모습 담아

들레의 비상·지복영 지음, 이준식 정리 역사문제연구소 발행ㆍ

300쪽ㆍ1만5,000원


남편은 조선인, 아내는 중국인이었다. 부부는 항일혁명에 투신해 조선에서, 중국에서 가시밭길을 걸었다. 그리고 1939년 3월의 어느 날, 동시 처형됐다. 마오쩌둥의 홍군이 대장정 끝에 안착한 연안에서 트로츠키파로, 일제의 간첩으로 몰려 총살됐다. 남편은 28세, 아내는 27세였다. 부부는 불꽃 같았던 짧은 생을 그렇게 마감했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항일혁명가 김찬(1911~39)ㆍ도개손(1912~39) 부부의 평전이다. 평남 진남포 출신으로 열 살 때 중국으로 이주한 김찬은 스무살 때 귀향해 혁명적 노동운동과 조선공산당 재건에 앞장선 인물이다. 중국 명문가 출신인 도개손은 북경대학의 이과계열 첫 여학생으로 입학 당시 언론에 대서특필된 재원이지만, 편한 길을 버리고 항일 혁명에 나섰다.

 

항일투쟁과 혁명 동지로, 인생의 반려로 죽음까지 함께한 이 부부의 파란만장한 삶은 어떤 영화보다 극적이다. 하지만 김찬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완전히 잊혀진 존재였다. 그런 이름이 어디 한둘이랴.

 

김찬이 체포 수감된 지 1년 만에 열린 조선공산당 재건사건 재판(1933)에서 그는 조봉암, 김단야와 함께 주모자로 지목됐다. 체포 후 무려 45일간 혹독한 고문을 버텨냈다. 그를 고문한 일제 경찰이 남긴 수기에 “다수의 사상범 중 검거 후 45일까지 범행을 부인한 인물은 김찬 외에 유례가 없다”는 기록이 있다.

 

1931년 1월 진남포 삼성정미소의 10대 여공들이 21일간 공장을 점거하고 벌인 파업농성은 그 해 조선 전역을 휩쓴 노동자 대투쟁의 선구다. 공장 노동자를 조직하라는 코민테른 지령에 따라 김찬이 지도한 사건이다.

 

                    잊혀진 항일혁명가 김찬(1911~1939).공명 제공


  아내 도개손과 함께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으로 아들인 재중동포 김연상씨가 갖고 있던 것이다.

명 제공

 

조선공산당 재건 사건으로 1년 6개월 형을 살고 나와 다시 중국으로 간 김찬은 1935년 도개손과 결혼했다. 도개손은 집안의 반대를 물리치고 식민지 조선 청년을 선택했다. 연안에서 최후를 맞을 때도 남편 김찬을 버리면 살 수 있었지만 끝내 거부하고 죽음을 함께했다. 처형 한 달 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김찬을 본 도개손은 가위로 한쪽 눈을 찌르고 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부부는 그렇게 피투성이가 된 채 총살형으로 최후를 맞았다.

 

부부는 연안에서 중국공산당 간부 양성학교 입학을 허가 받았을 만큼 당성과 항일투쟁 경력을 인정받은 상태였지만, 중국 공산당에서 벌어진 정풍운동의 광풍에 희생됐다. 사후 43년만인 1982년에야 중국 공산당은 부부를 복권시켰다.

 

평전이 복원한 부부의 삶은 1930년대 조선 진남포와 경성, 중국 상해와 북경, 하얼빈, 남경, 연안으로 무대를 옮겨가며 펼쳐진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고 독일 유학을 준비하던 김찬, 피아노를 잘 치던 여학생 도개손이 항일혁명가로 활동하면서 만나 사랑하고 죽기까지 아름답고 치열했던 두 청춘의 짧은 생애를 따라가노라면, 광복 70년을 맞도록 여태 그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불러주지 못한 못난 후손들은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일간지 기자인 저자는 10년 간 취재하고 유족을 인터뷰해 이 책을 썼다.

 

독립운동사에서 상대적으로 더 묻힌 이름은 여성 항일투사다. 한국 최초 여성비행사 권기옥(1901~88)의 평전 ‘날개옷을 찾아서’,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의 딸이자 여성 광복군 지복영(1919~2007)의 회고록 ‘민들레의 비상’에서 그 자취를 만난다.

 

권기옥은 조국 해방을 위해 날아오른 독립운동의 강철 날개다. 평양 숭의여학교 재학 시절 3ㆍ1운동에 참여해 6개월 옥고를 치른 그는 석방 후 임시정부의 비밀연락원 등으로 활동하다 상하이로 망명, 1925년 윈난항공학교에 입학해 중국과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가 됐다. 임시정부 독립군이 추진하던 항공대 창설이 무위로 돌아가자 중국 공군에 투신해 싸웠다. 해방 직전 임시정부의 조국 진공작전 계획을 입안했고, 해방 후 조국의 공군 창설에 이바지했다.

 

지복영이 쓰고 그의 아들이 정리한 회고록 ‘민들레의 비상’에는 독립투사와 그 가족들이 겪은 고난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섯 살 때인 1924년 어머니와 오빠를 따라 아버지가 있는 만주로 갔다. 끝없는 유랑과 가난 속에서도 놓을 수 없었던 향학열, 국치일이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끼니를 거르며 치욕을 되새기고 독립을 다짐하던 당시 동포들의 모습 등을 회고했다. 저자는 1938~39년 대일 선전공작에 참여했고, 1940년 광복군이 창설되자 자원 입대해 ‘광복’ 잡지 발간, 적정 탐지, 광복군 초모 활동, 대적 선전방송 등에 복무했다. 해방 후에는 도서관 사서, 교사로 일했다.

 

김찬ㆍ도개손 부부의 잊혀진 삶에 비해 권기옥 김복영, 두 여성 투사는 그마나 알려졌고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국립현충원에 영면하고 있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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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 무성한 친일 거두의 무덤.. 관광객 붐비는 의병장의 생가

            한국일보 | 박주희 | 입력 2015.08.14. 20:47 | 수정 2015.08.14. 22:17

문명기 일가와 신돌석 생가… 역사는 결국 옳은 길 찾아간다

경북 영덕군에 위치한 일제시대 대표적인 친일파 문명기의 묘는 관리를 받지 않아 잡초가 무성하고 봉분의 떼가 크게 벗겨져 있다.

반면 같은 지역 의병 신돌석 장군의 생가 주변은 작은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하게 보존돼 있다.

기자가 지난 11일 경북 영덕군을 방문한 것은 항일의병장 신돌석 장군과 친일 기업가 문명기 후손의 극명하게 대조되는 삶을 추적(본보 13일자 1ㆍ4면)하기 위해서였다. 광복 70년이나 된 마당에 취재 단서가 남아 있을까. 일제에 부역하며 영화를 누린 친일파는 사후에도 번듯하게 모셔져 있겠지. 서울에서 출발하며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어줍잖은 기자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곳은 청산되지 않은 친일파의 부활과, 역사 바로잡기라는 한국 근현대사의 두 가지 흐름이 여전히 길항하는 생생한 현장이었다.


문명기 일가를 취재하기 위해 접촉한 주민들은 어딘가 비협조적이었다. 출발 전 제법 넉넉하게 파악해 뒀던 취재원 중 일부는 연락이 두절되거나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겼다며 기자를 피했고, 즉석에서 섭외한 주민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기사가 '펑크'날까 전전긍긍하며 반나절을 보낸 뒤에야 어렵사리 몇몇 주민들로부터 문명기 일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문명기가 환갑 넘어 얻은 딸이 2000년대 중반 지역사회를 찾아와 선대의 미화작업을 시도했던 일화, 문명기가 일제 경찰서장에게 줄을 대기 위해 서장 집 앞에 고등어(일본어 사바ㆍさば)를 걸어둔 것이 아부를 뜻하는 '사바사바'의 유래가 됐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까지, 생생한 증언이 줄을 이었다.

마을 주민들이 문명기 일가에 대한 언급을 꺼렸던 이유도 알게 됐다. 문명기의 손자가 군사정권 시절 국회의원과 장관을 지냈고, 그의 딸 역시 여성단체 간부 등 지역 유력인사로 살아와 주민들은 지금도 문씨 일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도 족히 지난 친일파 인사의 영향력이 지금도 살아 있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문씨 일가의 위세를 새삼 느끼면서 문명기의 묘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주민들이 설명해준 길을 아무리 기웃거려도 산소로 통하는 입구를 찾을 수 없었다. 도무지 사람이 다녔다고 믿기 어려운 산길을 따라 20여분 올라가자 드디어 문명기의 묘가 나왔다. 하지만 눈 앞에서 맞닥뜨린 묘역은 의외의 모습이었다. 봉분의 떼는 곳곳이 벗겨지고 상돌도 기운데다 몇 년간 벌초를 하지 않았는지 잡초가 무성했다. 수십년간 지역사회를 호령했던 친일 거두의 무덤치곤 너무나 초라했다. 주민들은 손자 태준씨의 건강이 악화한 뒤로 후손들이 자주 찾지 않는다고 했다. 주민들이 가끔 무덤을 둘러봐 줄 법도 하지만, 그 누구도 무덤은커녕 묘로 향하는 길조차 관리해주지 않았다.

문명기의 묘는 신돌석 장군 생가와 많은 대비를 이뤘다. 신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95년 복원된 생가와 인근 기념관은 주중 400여명의 방문객이 꾸준히 찾는 관광코스가 됐다. 매해 6월과 8월 열리는 신 장군 추모제에도 전국 각지에서 1,000여명이 방문한다. 붐비는 인파에도 생가와 기념관은 쓰레기 하나 없이 정갈하게 유지되고 있다. 이 극명한 대비에 두 인물을 대하는 우리 국민의 마음이 반영돼 있음은 물론일 것이다.

애국자와 민족반역자를 대하는 사회적 인식은 비단 신돌석-문명기 두 인물에 국한되지 않는다. 본보가 광복회 회원 6,831명 전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생활실태 설문조사(12일자 1면)에서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열악한 삶이 3대, 4대로 대물림 되는 현실을 보도하자 독자들은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반지하방에 살고 있는 최진동 장군의 손녀 정선(76)씨 사연(12일자 5면)에 현직 국회의원들은 도움을 자처했고, 친일 조상이 남긴 재산을 밑천 삼아 떵떵거리며 사는 후손들을 분석한 기사(13일자 5면)를 읽고 수많은 네티즌이 분개했다. 지난 70년은 친일세력의 궤변과 뻔뻔함에 짓눌리고 왜곡되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의 물줄기는 굴곡이 있어도 결국 올바른 길을 찾아간다는 교훈을 기자는 다시 떠올렸다.

글ㆍ사진=박주희기자 jxp938@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