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슬픈 자화장

2017. 12. 25. 15:08진실


 

"한국은 우리를 전자제품처럼 수출했다"


'재외동포' 자격 잃은 스웨덴 한인 입양인들의 울분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대한민국으로부터 버려진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한민국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외국국적 동포’로서 ‘재외동포’가 돼야 한다.”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의 나라 스웨덴에서 21세기 ‘수잔 브링크’들이 한국 정부를 향해 항의하고 있다. “왜 우리는 대한민국의 끄트머리도 잡을 수 없는 것이냐”고. “대한민국 정부는 왜 우리를 자신들에게서 완전히 지워버리려고 하는 것이냐”고.


현재 스웨덴에 거주 중인 한인 입양인은 약 1만1000명. 인접국인 덴마크와 노르웨이에도 각각 9500명이 살고 있다. 유럽 전체 한국인 입양인 6만5000명 중 절반가량이 북유럽 3개 나라에 살고 있는 셈이다. 스웨덴의 1년 이상 장기 거주 대한민국 재외국민이 3100명 정도니 입양인은 그 3배, 재외국민 수가 1000명인 노르웨이는 9배가 넘고, 680명인 덴마크는 14배에 이른다.


그런 그들이 왜 한국 정부를 향해 울분을 토하고 있을까. 1977년 4월 스웨덴에 입양된 다니엘 리(한국 이름 이남원·40)는 “한국은 무책임하고, 우리는 억울하다”고 얘기한다. 이씨를 포함한 해외 입양인들은 이명박 정부 시절 ‘재외동포’ 자격을 상실하고 완전한 ‘외국인’으로 분류된 것에 강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그들은 해외 입양인들이 광의(廣義)의 대한민국 국민의 범주에서도 배제됐다고 말한다.


우리에게서 ‘대한민국’ 흔적 지우려 한다”

2008년 3월 개정된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약칭 재외동포법) 제2조 2항에는 ‘재외동포’ 중 대한민국 국적자인 ‘재외국민’ 외 대한민국 국적자는 아니지만 재외동포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외국국적동포’ 규정이 있다. ‘대한민국의 국적을 보유하였던 자(대한민국정부 수립 전에 국외로 이주한 동포를 포함한다) 또는 그 직계비속으로서 외국국적을 취득한 자 중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자’를 ‘외국국적동포’라고 한다.


같은 법의 시행령 제3조 2항에는 ‘부모의 일방 또는 조부모의 일방이 대한민국의 국적을 보유하였던 자로서 외국국적을 취득한 자’라고 추가 규정을 해 이른바 3세까지 재외동포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외국국적동포’는 선거권, 피선거권은 물론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권리를 지니지 않고 있지만, 재외동포법에 의해 체류 자격을 얻고 국내에 주거지를 정해 놓으면 지역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 또한 금융이나 부동산 거래에 있어서도 대한민국 국민과 동등한 권리를 누린다. 출입국관리법에 의한 재입국 허가를 받는 불편함도 생략할 수 있다.


그런데 해외 입양인들은 이런 ‘재외동포’의 권리를 박탈당했다. 법 개정으로 더 이상 ‘재외동포’의 자격을 유지할 수 없다 보니 한국 내에서도, 한국을 출입할 때도 다른 외국인들과 똑같은 제약을 받아야만 한다.


이들이 억울해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다니엘 리는 “우리는 스웨덴에 입양 올 때 분명 대한민국 여권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우리 중 한국 부모님을 찾은 사람도 적지 않다. 그래서 다양한 경로로 대한민국을 스웨덴에 알리는 역할을 한다”고 얘기하며 “스웨덴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대한민국’의 흔적들을 분명히 보는데, 한국은 우리에게서 ‘대한민국’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려고 애쓰는 것 같다”며 한국 정부에 대한 비판을 숨기지 않는다.


2016년에 창립 30주년을 맞은 스웨덴 한인입양인협회 회장을 3차례 역임한 마틴 손은 “원래 우리 협회는 재외동포재단에서 지원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때 복지부로 이관됐다. 그런 후 한국 정부는 점점 더 우리 협회와 멀어졌다. 스웨덴에 있는 입양인들을 한국 내에 있는 복지부에서 관리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얘기한다. 그는 한국 정부가 국내 입양과 해외 입양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스웨덴 한인입양인협회 회장을 역임한 다니엘 리(오른쪽)와 마틴 손 © 이석원 제공

 

65년간 ‘입양아 수출국’ 오명 못 벗는 이유

1994년 스웨덴에 처음 ‘스웨덴 한인입양인 후원회’를 설립해 지금까지 입양인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강진중 회장은 “현재 스웨덴에 있는 한인 입양인들은 스웨덴의 재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하지만 아마도 한국 정부는 그런 사실조차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강 회장은 “중앙아시아나 과거 소비에트 연방에 속했던 나라에 살고 있는 고려인의 경우 3세들까지도 재외동포법에 의거해 ‘재외동포’로 규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권리를 부여하면서도 해외 입양인들에게는 그러지 않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얘기한다.


강 회장은 “현재 스웨덴에 있는 한인 입양인들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한인 입양인끼리 결혼하는 경우도 많다. 그들은 분명 한국인의 외모와 DNA를 지니고 있고, 그들의 자녀들도 그렇다”고 강조하며 “해외 입양인에 대한 실질적인 업무를 보건복지부가 아닌 외교부 산하 재외동포재단으로 이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 다니엘 리와 마틴 손도 자신들의 성을 스웨덴 부모님의 성이 아닌 한국 부모님의 성으로 바꿨다. 또 두 사람 모두 같은 처지의 한인 입양인과 결혼해 완벽한 한국인의 유전자를 지닌 자녀들을 낳아 키우고 있다.


스웨덴 사회복지학계의 보고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 해외 입양인 수는 약 50만 명에 이른다. 그런데 그중 40%인 20만 명이 한국의 입양인들이다. 또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현재 해외 입양의 경우 국내 입양기관이 받는 수수료가 1600만원에서 2300만원에 이른다. 하지만 해외의 입양 양부모가 현지 입양기관에 지불하는 수수료는 그보다 최대 3배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니 지난 65년간 한국이 ‘입양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다니엘 리는 “이제는 해외로 입양을 보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모든 문제는 대한민국 스스로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한다. 해외 입양은 부끄러운 일이다. 버려진 아이들을 한국이 품지 못하고 전자 제품처럼 비행기에 실어서 외국에 수출하는 일은 이제 중단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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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먹다⑦]


조기잡던 어부 김흥수와 바지락 젓갈

      [오마이뉴스 글:변상철, 편집:홍현진]


지난주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김장하는 김에 너희들 먹으라고 좀 넉넉히 담갔으니 어여 와서 가져가. 김장김치가 다 시겠다.


"바쁘다는 핑계로 의정부에 홀로 사시는 어머니를 찾아가는 것을 차일피일 미뤘지만 더 이상은 미루기 어려워 냉장고를 정리한 후 가기로 했다. 김치를 넣어둘 냉장고의 야채 칸을 정리할 마음으로 열었는데 비릿한 생선냄새가 풍겼다.


"아, 조기하고 바지락젓."

그 젓갈 냄새는 나의 기억을 인천 주안으로 되돌렸다.


2011년 봄, 나는 인천 주안동의 한 빌라를 찾았다. 온갖 해산물의 비린내 가득한 신기시장을 가로질러 걸었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거미줄 같이 좁은 골목들 사이로 오래된 연립과 빌라가 가득한 주택가를 마주해야 했다.


비슷비슷하게 지어진 집들은 모양과 구조가 비슷했다. 그런 동네를 몇 블록 지나자 파란 조끼를 입고 지팡이를 어깨에 걸친 채 골목을 내려다 보고 있는 노인을 만났다. 그는 나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며 말했다.


"변 조사관이에요?"
"아, 김흥수 선생님이세요?"
"아이고,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요."


'선장질' 하다 '간첩'된 남편

 덕적도에서 인천으로 나오는 배 안에서 김흥수. 아픈 다리를 이끌고 덕적도를 헤매고

걸었던 그는 여객선의 객실에서 지쳐 누웠다. 그는 배를 타고 세계여행을 다니고 싶어한다.

ⓒ 변상철


다리가 불편한 그는 나를 집으로 안내했다. 그의 집은 연립 2층이었다. 오래된 집 계단은 좁고 가팔랐다. 그의 뒤를 따라 계단으로 오르는 동안 그가 넘어질까 조심스레 바라보며 따라 올랐다. 집에 들어서자 나를 반긴 것은 코끝을 찌르는 생선 비린내였다. 곧 부인이 베란다 쪽에서 나와 반겨주었다.
         

"생선 냄새가 많이 나네요?"
"아, 조기랑 바지락 좀 손질한다고 꺼내놔서 그런가 봐요. 죄송해요."
"아뇨. 죄송하긴요."


괜한 말을 꺼냈다. 부인이 겸연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미안해 했다.


"한 평생을 바다만 바라보고 살았던 사람이 무슨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구, 그냥 바다에서 배만 몰았잖아요. 그러다가 간첩도 되고..."


부인이 남편 자랑을 계속했다.


"우리 영감이 배를 잘 몰았어요. 그래서 여기저기서 선장질을 좀 해 달라고 해서 배를 참 잘 몰았어요. 고기떼 있는 데를 기가 막히게 찾아다니거든요. 그래서 우리 영감이 모는 배는 늘 만선이었어요. 그러니 서로 자기 배를 몰아 달라고 하지. 인기가 좋았어요."


부인은 그 옛날 어선의 선장실에서 조기떼를 쫓아 넓디넓은 바다를 자유롭게 떠다니는 남편을 회상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그 선장질 때문에 지금 이 고생 아녀."


부부는 한국전쟁 때 이북에서 피난 온 피난민이다. 전쟁이 잠깐이면 끝날 것이라는 기대감에 고향에서 멀지 않은 이곳 덕적에 각각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전쟁은 길어졌고, 한반도는 두 동강 나 버렸다. 분단은 육지뿐만 아니라 바닷길마저 갈라놓았다. 전쟁의 총성이 멈춘 후 그들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난 덕적도 북리에 살고 있었고, 마누라는 지금 덕적항이 있는 진리에 살고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집안 몰래 연애했지. 바다 나갔다 오면 북리에서 진리까지 10킬로미터도 넘는 길을 걸어서 밤새 만나고 다시 그 길을 걸어서 배 타러 나가곤 했어요. 그땐 서로 좋아서 죽고 못 살았지."


그의 연애담에 아내는 호호 웃으며 부끄러워했다.


"술 담배도 안 하고 돈도 착실히 모으고, 일도 성실하게 했어요. 마을에서 얼마나 칭찬이 자자했는지 몰라요. 젊은 사람이 한눈 팔지 않고 일만 열심히 한다고. 그러니 집안에서도 결혼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죠."


두 사람은 곧 결혼을 하였고, 아이도 다섯이나 낳으며 행복했다. 일은 힘에 부쳤으나 행복했다. 누구나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었지만 그는 그 시간마저 달콤했다.


간첩 혐의로 12년을 감옥에 



1977년 8월, 여름의 바다는 더웠다. 여름 바다 일은 늘 밤에 이뤄진다. 해를 피할 곳 없는 망망대해 바다에서 낮에 조업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그러나 여름 장마철 해무와 함께 올라오는 멸치를 잡기 위해서는 다시 바다에 서야 한다.


그렇게 두 달여를 바다에서 보내고 인천항에 배를 대고 육지로 내려오자마자 그는 덩치 좋은 남자들에 의해 납치되듯 잡혀 갔다. 1963년도에 납북되었다가 13일만에 귀환된 것이 문제가 되었나 싶었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 이미 그는 몇 달간에 걸쳐 조사를 받고 그에 따른 처벌도 받은 상태였다.


"처음 대공분실에 잡혀갔을 때는 63년도에 북한에 납북됐다가 돌아온 일이 문제가 됐나 했어요. 간첩 혐의로 날 잡아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으니까."


그곳에서 두 달간 잡혀 있었다. 잡혀 가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을 자서전처럼 이야기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조업을 하며 보았던 경비선의 실태, 덕적도에 있는 관공서에 대해 알고 있는 대로 말했다. 그의 입에서 말하는 모든 것이 이후 '국가기밀 탐지' 혐의가 될 줄 꿈에도 몰랐다.


처음 며칠은 수사관의 태도가 친절했으나 점차 그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며칠 있다가 덩치 좋은 남자 하나가 들어와요. 그 수사관이 그러길 북한에서 어떤 지령을 받고 왔느냐는 거예요. 기가 막히더라고요. 내가 무슨 지령을 받았다는데 답답해 죽겠더만요. 근데 그 놈이 물고문을 하고 손가락을 비틀고, 의자에 묶어 놓고 손가락에 전기선을 묶어 놓고 전기고문하고 별 지랄을 다했어요. 백정이에요. 고문하는 백정 놈!"


옆에서 듣고 있던 부인이 거들었다.


"남편이 잡혀가고 나서 나도 데려갔어요. 인천에 있는 무슨 경찰서라는데 거기 가니까 남자 하나가 서류를 하나 딱 줘요. 그러면서 나한테 말하길 '여기에다 서명만 하면 남편을 내보내준다'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무슨 내용이냐고 물었더니 남편을 집으로 돌려보내준다는 내용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러마 하고 무인을 꽉 찍었죠.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이 간첩했다는 걸 인정한다는 내용이라는 거예요. 내가 남편을 간첩 만든 거잖아요.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아내는 학교를 다닌 적이 없었다. 수사관들은 한글을 모르는 아내의 약점을 이용해 수사 내용을 조작했던 것이다. 남편을 찾아온 남파간첩에게 음식을 주는 등 편의를 제공했다는 내용이었다.


"시어머니가 남편 잡아먹었다고 얼마나 나를 구박했는지 몰라요. 머리채를 잡고 온 동네를 다 돌아다녔어요. 너무도 창피해서 더 이상 섬에서 살 수가 없었어요."


그는 간첩 혐의로 12년을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 너무 억울해서 자살도 생각했다. 하지만 매일매일 가족을 생각하며 진실을 밝힐 때까지 망가지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았다. 망가지지 않기 노력했던 것은 밖에서 그를 기다리던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무너지지 않고 버텨내기 위해 그녀는 조기와 바지락을 어선에서 떼어다가 인천 어디든 행상을 다녔다.


"애들 사는 주안에서는 사람들 눈이 있어서 멀리 부평이나 계산동 같은 곳에까지 가서 생선과 바지락을 팔았어요. 그런데 아주머니들이 맛있다고 입소문을 내주더라고요. 나중에는 군부대 장교 부인들한테도 입소문이 돌아서 단체로 사곤 했어요. 처음에는 무섭더니 그것도 자주 보니 인이 박히더만요. 군인 부인들한테 기죽기 싫어서 더 싱싱하고 살이 통통한 놈으로다만 가지고 가서 팔았어요. 그것도 자존심이라고."


이.근.안 그 놈 얼굴


아내의 행상은 그가 출소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막내아들까지 결혼 시킨 후 두 부부는 과거의 일을 잊고 사는 듯했다. 그러다가 텔레비전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그날도 생선 구워서 바지락젓에 밥을 먹고 있는데 텔레비전에서 고문경찰관이 출소한다 어쩐다 하는 뉴스가 나오는 거예요. 근데 그 놈 얼굴이 점점 큼지막하게 나오는데 아 글쎄 날 고문했던 그 놈이더라고요. 그때서야 그 놈 이름을 알았어요."


그랬다. 그는 텔레비전을 볼 여유도 없을 만큼 먹고 살기 바빴던 것이다. 세상사람 다 아는 그놈이었지만 정작 그는 자신을 고문한 그 놈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 놈 이름이 텔레비전 자막으로 흘렀다.


'이근안'


"가만히 못 있겠더라고요. 막 뭐라도 해야겠더라고요. 그럴 때 '지금여기에'(국가폭력피해자 지원단체)를 알게 된 거예요. 이렇게 연락이 닿아서 얼마나 다행이에요."
 

그의 이야기가 정리될 때쯤 그의 아내가 검은 봉지 두 개를 내밀었다.


"드릴 건 없고 조기하고 바지락 젓갈 좀 담았어요."


튼실하고 통통한 조기와 바지락 젓갈이 가득 들어 있었다.


"제가 잘 하는 게 이것밖에 없어요. 이것 손질해서 자식새끼들 키웠는데, 요즘은 허리랑 다리가 아파서 통 나가지를 못해요. 그래서 우리 가족이나 먹을 요량으로 누가 가져 오면 조금씩 손질해서 요리나 하는 정도예요."


그날 저녁, 조기를 구우니 비린 냄새 하나 없이 고소했다. 바지락 젓갈은 고춧가루와 풋고추를 잘게 썰어 담가두었다가 먹으니 그 맛이 깊고 정갈했다.




경찰 수사 당시 그가 고문을 가장 많이 당했던 이유 중 하나가 덕적도에 있는 관공서 건물과 경비선 실태 등에 대한 군사기밀을 탐지해 남파간첩에게 알려줬다는 진술을 강요 받을 때였다. 
         

2014년 봄, 나는 그와 함께 덕적도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그가 탐지했다고 판결문에 기재되어 있는 건물들을 하나하나 살펴 보았다.


그런데 덕적파출소에 들렀을 때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판결문에 따르면, 그가 간첩에게 덕적파출소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 것이 1976년이었다. 그런데 1976년도에 덕적파출소는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덕적파출소가 창설된 것은 이듬해인 1977년이었다.


수사 과정에서 이근안은 아직 지어지지도 않은 건물을 그가 탐지했다고 조작하는 해프닝을 벌인 것이다. 그럼에도 검찰과 법원은 별다른 의심과 검증 없이 유죄 판결을 내렸다.


개인이 삶의 과정에서 알게 된 모든 지식은 국가보안법 혐의 아래 모두 유죄가 될 수 있다. 붉은 사상이 그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할 수만 있다면. '고문'은 그 과정에서 유죄의 증거를 만드는 유용한 기술이었다. 아니, 이근안의 입을 빌리자면 '예술'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가 어부 생활을 하면서 보았던 바다, 마을 건물 모두가 간첩 혐의의 증거가 되었다.


그는 2015년 서울고등법원에 신청한 재심사건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아냈다. 무죄 확정 후 다시 만난 그는, 나에게 작은 소원을 이야기했다.


"나 죽기 전에 소원이 하나 있다니까. 뭐냐면 나는 고문후유증으로 다리가 절단 나고, 마누라는 행상 다니느라 다리가 아파서 걷질 못하잖아. 그래서 어딜 걸어 다닐 수가 있어야지. 그래 작은 배라도 하나 사서 세계일주 해 보는 것이 소원이야. 배는 다리가 아파도 상관 없이 몰 수가 있잖아. 내가 제일 잘하는 것도 배 모는 일이니. 마누라 태우고 가고 싶은 곳 어디든지 가면 좋겠어. 죽기 전 소원이 그거야. 고향 땅에라도 가 보면 더 좋고."


그가 평생을 쫓던 바다 속 조기떼는 가지 못할 바다와 경계가 없다. 그러나 조기떼를 쫓던 인간에게 바다의 경계는 분명하다. 그는 그 바다를 자유로이 누비고 싶다.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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