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일본군의 무자비한 살상에 의해 죽어간 선조들 (임산부나 노약자는 보시지마시기 바랍니다)--

2018. 1. 4. 23:03진실

 

 

 

 

 

 

 

 

 

 

 

 

아기들의 주검

어린아이들 까지...
일본은 사람을 죽이는데 있어
아이,어른을 가리질 않았다.

 

 

 

 

 

 

 

 

 

생매장...

살아있는 사람을 땅속에 생매장 시키는 장면...

 

 

잔인한 일본군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

 

 

 

 

 

의병총살

의병체포

 

 

 

 

 

 

독립투사 체포 현장

 

 

 

북간도(조선인마을)

 

 

결국 비참하게 한을품은 채로 일본헌병에게  무참히 사살된 현장
(The innocent man's worst fear comes true as he is shot to death ruthlessly by the soldier.)


처형후 일본 두병사의 자랑스런 자세로 기념찰영
(After the completion of the execution, proud Japanese executioners are
taking a souvenir picture in front of their chopped victim.)

 

 

작두 처형

 

작두로 처형 전

작두로 처형 중

작두로 잘려진 얼굴

 

잔악 무도한 일본군들이 대량 학살 하고난뒤 처참한 광경 고랑에 즐비한 시체들중에 뒤에 흰색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 과  다른 사람들이 가족의 시신을 찾기위해 살펴보고 있는중.

 


 

 

만주 벌판에서 독립군을 사냥하는 장면이다
총으로 위협사격을하고 포로가 되면   또다시 잔악 행위가 이루어 진다.

 

 

일본제19사단

 전쟁이 끝날무렵 일본군들은 청소년 까지 군사교육을 시켰다

 

 집단 사살

창고에서 독살


일본군 놈들은 잔악하게 죽은
사람들을고히 묻어주지는 못할망정...
나무에 매달아 놓고 즐거워 한다...
도대체 이 놈들에게는 인간의 모습이라곤
눈씻고 찾아봐도 없는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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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균전의 주동자

위에 보이는 미친놈이 731부대 세균전의 주동자였다...
이놈의 입에다가 세균전에 썻던 것들을
다 넣어 주고 싶다...

집중사격

만주벌판에서 항일병(또는 민간인)
을 사냥하는 장면이다...
총으로 위협을하고 포위하면
또다시 잔악한 행위가 이루어진다...

잔악한 처형의 순간...

칼로 목을 칠 때 몸이 넘어가지 않도록
팔을 뒤로 묶어 목을 내리치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이다.
처음 이 사진을 접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이 페이지를 만들면서도 일본의 잔악함에 치를 떨었다...죽일놈들...)

 

얼굴 전시...

일본군은 포로가 된 민간인들의
목을 베어 마치 상품을 진열해논 듯 전시하고 있다...

장난삼아 하는 살인...

한 일본군이 시신의 목을베어 그 머리의 귀를 잡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웃고 있는 일본군의 표정으로 보아 죄의식이라던가,
일말의 양심조차 없어보인다.
사람의 목숨을 파리목숨으로 여긴 일본제국주의의 허상이
그대로 담겨져 있는 뼈아픈 사진이다.
지 애비가 죽을 때도 웃고 있을 쪽바리 새끼들...

처형직전의 모습

일본군에게 저항하다가
처형당하기 직전의 모습...

살인을 하고 난 후 모습

니 살인을 하고 난

확인사살

일본인들은 수많은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였는데
사진은 죽은시신의 죽음을 확인하기위해
다시한번 개를 시켜 죽이는 장면이다.

인질을 가지고...

항일투쟁을 하다 피신한 사람외
도망가지 못한 가족들에게
독한 고문을 하기 직전의 모습

얼굴전시

미친 일본군놈들...
일본군이 항일병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기 위해
머리를 잘라 전시하는 장면

작두처형...

사람을 작두위에 올려놓고 처형하는 장면이다...
이는 결코 연출된 장면이 아니다...
작두위에 사람의 머리을 올려놓고
주위의 일본헌병들이 처형을 돕고 있다...

잔인한 일본군에 죽음을 당한 사람들...

일본군 놈들은 잔악하게
죽은 사람들을 고히 묻어주지는 못할망정...
나무에 매달아 놓고 즐거워 한다...
도대체 이 개새끼들은 인간의 모습이라곤
눈씻고 찾아봐도 없는거 같다...

인질로 끌려가는 민간인

무고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차에 태우는 일본군들...
이들은 마루타부대(731부대)로 호송된다...

그들에 의에 죽어간 사람들...

일본군의 무자비한 살상에
의해 죽어간 사람들...

뒤 태

방공호의 죽음

일본군은 방공호에 숨어있던 민간인들을
아이와 여자할 것없이 무차별적으로 학살
그 잔학상이 실로 극에 달하였다.

 

강제 징용

죄 없는 민간인들을
강제 징용시키면서 힘든 일들을
시키고 있다.
아직도 일본에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

일본군의 여성폭행...그리고 성희롱...

위의 사진은 일본인이 한여성을 폭행하여
내장이 터져나온 모습이다.
그리고 아래사진은 한 여성의 하체를 벗겨놓고
희롱하고 있는 사진인데...
우리나라에도 정신대 할머니들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2차대전때 그 피해국가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퍼져있는데. 심지어는 네덜란드에서도 그 소문이......

 

일본군의 잔인함

일본의 만행에 대한 책들이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세균폭탄...

비행기에서 투하할 세균폭탄...
이런걸 만들면서...
이 죽일놈들의 일본놈들은 원자폭탄으로 피해
많이 봤다구 지랄들이다....미친놈들...

 

 

 

 

 

 

 

 

 

 

 

 

 

 

 


 

731부대 ...두 번다시 보기 싫은곳...


 


일본군들은 수많은 생체실
 

험과 잔인무도한 학살을 자행했다.

 

 

 

 

마취도 안된상태에서 생체실험을
하고 있는 일본군들...
뒤에 마스크를 쓰고 실험내용을 지켜보고 있는 일본군장교...

 

 

日, 한국점령 36년간 산림 110조어치 강탈
[서울경제 2005-04-04 18:07]    

일제 36년 동안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수탈한 산림은 5억㎥에 달했다. 이는 지난 2003년 말 기준 남한의 산림 축적량 4억6,800만㎥보다 많은 규모다.

4일 산림청에 따르면 1910년 한일합방 이전 우리나라의 산림 축적량은 ㏊당 43㎥에 이르렀으나 45년 광복이 됐을 때에는 ㏊당 6㎥로 대폭 줄어들었다.

일제가 수탈한 산림을 현재 가치로 평가하면 110조원을 상회한다. 국내 목재의 ㎥당 가격이 10만원 수준인 점을 감안할 때 일제에 수탈된 목재 5억㎥를 돈으로 환산할 경우 50조원에 이른다. 또 최근 국립산림과학원이 2003년 말 현재 국내 산림의 공익적 가치가 58조8,000억원을 넘어섰다고 평가했는데 일제 수탈 산림의 공익적 가치는 현재 기준으로 평가하면 60조원을 훨씬 넘게 된다.

일제는 특히 보존가치가 매우 높은 수령 200~300년의 천연자연림 수탈에 적극적이었다. 일제는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밀집된 천연자연림을 대부분 수탈했다.

조선총독부 임야통계에 따르면 27년부터 41년 사이 압록강유역 평안북도의 산림축적이 2,100만㎥ 감소했고 두만강유역 함경북도는 1,600만㎥가 줄어들었다. 또 태백산맥이 포함된 함경남도의 산림축적도 2,900만㎥나 사라졌다. 북부 국유림 지역에서만 14년간 30%이상을 수탈한 것이다.

국립산림과학원의 배재수 박사는 “일제가 국유림에서 용재를 늘려 총독부 세원을 확대하려 한 결과로 보인다”며 “특히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만주 개발수요에 대응하고 전시자재를 충당하기 위해 표준 연벌량보다 2~3배 늘려 산림을 수탈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산림청은 ㏊당 73㎥인 임목축적량을 오는 2050년까지 선진국 수준인 157㎥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를 위해 2030년까지 인공식재림 240만㏊를 조성하고 우량 천연림 110㏊를 조성ㆍ관리하기로 했다. 또 2050년까지 100㏊의 해외조림도 실시할 계획이다.



대전=박희윤 기자 hypark@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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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군은

"사람고기값보다 돼지고기값이 비싸다"고

말했다고 한다.

적어도 돼지고기는 먹을수는 있으니까...

 

 

 

"日軍 조선처녀로 ××× 만들어 먹여"
[연합뉴스 2005-04-27 13:25]
북 생존 위안부 할머니 박영심

北 생존 위안부 박영심 할머니 증언

(서울=연합뉴스) 문성규 기자 = "요구에 응하지 않은 조선처녀를 죽여 가마솥에 넣어 끓인 뒤 그것을 고깃국이라고 속여 먹였습니다."

북한에 생존해 있는 한 위안부 할머니가 일본군의 끔찍한 만행을 증언, 다시 한번 일제의 잔혹성을 일깨우고 있다.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27일 `일본을 고발한다-강제연행 피해자들의 증언'이라는 연재물의 첫 번째 순서로 박영심(83) 할머니의 사연을 소개했다.

박 할머니는 체험담에서 "일본놈들이 어느날 `너희들이 식사도 변변히 못하고 있으니 오늘은 고깃국을 대접하겠다'면서 고깃국을 주었다"면서 "영문도 모르고 다 먹었더니 놈들은 그 고깃국이 `조선처녀의 고기로 만든 국'이라며 껄껄 웃어댔다"고 말했다.

박 할머니는 "(일본군은) 저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던 처녀를 죽여 가마에 넣어 끓였다고 했다"며 "일본놈들은 정말로 짐승같은 놈"이라며 치를 떨었다.

그가 위안부로 끌려간 것은 꽃다운 나이인 17살 때(1938년).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와 탄광 인부로 일하는 아버지 슬하에서 자라다가 14살 때 평안남도 남포시 후포동의 한 양복점의 식모로 팔려나갔다.

그러던 1938년 3월경 일본순사가 나타나 "좋은 일자리가 있으니 소개해 주겠다"고 해 "부모님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저항했으나 다짜고짜 기차에 실어 어딘가로 데려 갔다.

그 곳은 중국 난징(南京)이었다.

난징에는 일본군 병영들이 많았으며 그 병영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에 `금수로 위안소'가 있었다. 위안소는 3층으로 된 벽돌집이었으며 각 방의 크기는 가로 세로 2X2.5m로 방에는 침대가 하나씩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 소름이 끼쳤으나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몰랐다. 잠시 후 일본군인이 방에 들어와서야 무엇을 당하는가를 알아차렸으나 절대로 응하지 못하겠다고 저항했다.

그러자 마구 때리고 차면서 마지막에는 긴 칼을 뽑아 목에 들이대고 "이래도 응하지 못하는가"라고 위협했다.

그 날부터 하루에 일본군인 30여명을 대상으로 `성봉사'를 해야만 했으며, 하도 힘들어서 응하지 않으려고 할 때도 여러 번 있었는데 그들은 다짜고짜로 때리고 차고 때로는 칼로 찌르기도 하면서 그들의 수욕(獸慾)을 채웠다.

박 할머니는 "힘든 생활이 계속되어 아편을 먹고 견뎌보려고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며 "죽을래야 죽을 수 없고 살래야 살 수도 없어 정말로 기가 막혔다"고 당시의 기구했던 운명을 술회했다.

조선신보는 박 할머니가 중국 내의 여러 위안소에 끌려다니다가 광복을 맞아 한 중국인의 도움으로 고향에 돌아왔으며 그후 박 할머니는 자궁을 들어낸 데다 심장판막과 신경쇠약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박 할머니는 지금도 한밤중에 그때의 일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면 흠칫 놀라 잠에서 깨어난다며 "원한을 풀기 전에는 절대로 죽을 수 없다"고 절규했다고 조선신보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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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들은 결국 속아서 온 거야" (1부)
[단독인터뷰] 구 일본군 군속이 말하는 종군위안소 충격적 실태
 
박철현 기자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들이 얼마나 두려웠을지..."
 
마쓰바라 마사루(85) 씨는 인터뷰 도중 몇 번이고 심호흡을 했다. 담담하게 풀어나갔지만 역시 감정의 동요는 감출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지바 현 아비코 시의 시민단체 '아비코 평화네트' 회원인 그는 65년전 제국해군 군속(군무원)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
 
마쓰바라 씨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들고있던 손가방에서 당시 자료들을 꺼낸다. 그리고 그는 다시 겉옷 속주머니에서 샛노랗게 물든 명함크기 증명서를 탁자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이게 그 때 사용한 군 위안소 출입증입니다."
 
▲ 마쓰바라 씨가 발급받았던 위안소 출입증. 1943년 11월에 발급받았다고 한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가로 5.8센티, 세로 10.8센티의 그 증명서에는 '남국료출입증(南国寮出入証)'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위안소를 이용할 때엔 이 출입증을 가져가야 해요. 우리 부대 근처에는 두 군데가 있었죠. 하나가 여기 적혀져 있는 '남국료위안소'였고 또 하나는 '남성료(南星寮)위안소' 였습니다."

마쓰바라 씨는 "남국료와 남성료는 일본군 위안부들이 모여있는 시설로 군인, 군속들의 성적욕구 해결을 위한 시설로 사용됐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도 물론 남태평양 트럭(truck) 제도 일대로 배속된 1943년부터 '남국료'를 몇 번 이용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18~25세 정도되는 종군위안부들이 각 위안소에 5, 60명 정도씩 있었습니다. 44년부터는 더 늘어났어요. 마지막에는 아마 각각 70명 정도씩 되지 않았나 하네요. 일본인 위안부가 그중 10% 정도였고 나머지는 전부 조선에서 온 위안부들이었습니다."
 
1942년 제국해군 제4함대 시설대대에 배속된 마쓰바라 씨는, 43년 남태평양 마리아나 제도의 트럭제도에 둥지를 틀었다.
 
하루시마, 나쓰시마, 아키시마, 후유시마, 그리고 게쓰요시마, 가요시마, 수이요시마, 모쿠요시마, 긴요시마, 도요시마, 니치요시마 등 총 11개의 큰 섬과 100여개의 무인도로 구성된 트럭제도는 산호초로 둘러싸인 바다의 요새였다.
 
▲ 위안소 실태를 최초로 육성증언한 마쓰바라 마사루 씨. 그는 1998년 나카가와 농수산대신의 일본군 위안부 발언으로 인해 이 문제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그는 나쓰시마(夏島)에 주둔했고 이 안에 있는 두 위안소를 관리하는 시설대대 군속으로 일했다. 나쓰시마는 후방보급기지로 그 주변에는 각종 유곽, 술집, 식당, 옷가게 등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나쓰시마를 기준으로 각각 위 아래에 위치한 하루시마(春島), 아키시마(秋島)는 전투부대가 주둔했다. 양 섬은 물론 나쓰시마에 주둔하는 일본군 및 군속들은 일과가 끝나거나 휴일이 찾아오면 나쓰시마의 두 위안소를 이용했다.
 
"위안소 접수대엔 위안소를 이용하려는 군인들로 바글바글했습니다. 한산한 경우를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전투태세에 들어가거나 중요한 훈련이 있는 날엔 한산했을 수도 있지만 저도 그 땐 작전에 참가해야 하니까 실제로는 어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평균잡아서 종군위안부 한 명당 하루에 14, 15명 정도는 받아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1시간 10분간에 걸쳐 자신이 경험한 위안소의 모든 것을 담담하게 털어 놓았다. 하지만 그 역시 "조선에서 속아서 끌려 온 그녀들"을 추억하는 장면에서는 목소리가 떨린다.
 
"본명은 모르지만 '미도리'라는 이름을 가진 위안부가 나에게 울먹거리면서 '고향에 꼭 부쳐달라'며 소포를 건네 줬지요. 그 땐 그 정도 였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게 그녀 고향으로 잘 갔는지 지금도 마음에 걸립니다."
 
마쓰바라 씨는 언론에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말한다. 평화운동을 계속 해 왔기에 언젠간 말할 날이 오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다 보니 미뤄졌다. 
 
하지만 지난 1998년 당시 농수산성 나카가와 쇼이치 장관의 "종군위안부는 없었다"는 발언에 양심고백을 결심했다.
 
구 일본군 군속으로 위안소의 이용자이면서, 또 그 위안소를 관리하는 일을 맡아본 마쓰바라 마사루 씨. 그가 회고하는, 참혹하고 소름돋는 일본군 위안부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인터뷰는 2010년 4월 21일 지바 현 아비코 시 모처에서 1시간 10분에 걸쳐 진행됐다.)
 
- 오늘 이렇게 시간 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먼저 자기소개부터 부탁드립니다.
"저는 마쓰바라 마사루라고 합니다. 지금은 노랫말을 만들고, 또 시민단체 활동도 하고 있지만 1942년부터 44년까지 남태평양 북 마리아나 제도의 트럭제도에서 군속으로 복무했지요. 도쿄에서 따진다면 3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입니다. 트럭제도는 크게 11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본에서는 이 4개 섬을 하루, 나쓰, 아키, 후유시마라고 불렀지요. 왼쪽은 게쓰요시마를 중심으로 7개 섬이 있었지요. 산호초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외곽길이는 약 240킬로미터에 달했습니다."
 
- 위안소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병참기지, 그러니까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나쓰시마에 위안소가 두 개 있었습니다. 하나는 남국료(南国寮), 또 하나는 남성료(南星寮)였습니다."
 
- 그 위안소는 누가 관리했습니까?
"나쓰시마 일대가 제4해군함대의 기지였는데 이곳(나쓰시마)는 병참보급기지였어요. 제가 배속된 곳은 제4함대 시설부대였습니다. 부대장은 하기와라 간이치 대좌였지요. 제4함대 시설부대라는 건 제4함대에 소속된 부대입니다. 제4함대 사령장관은 고바야시 마사시 해군중장이었습니다. 제가 배속받은 이 시설부대가 위안소를 관리했습니다." 
 
- 시설부대는 위안소 관리만 했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위안소도 관리했지만 본국(일본)에서 넘어 온 죄수들도 관리했습니다. 한 700명 정도? 그들은 주로 잡역을 했습니다. 그 외에 한국에서 그러니까 당시엔 조선인데요. 조선에서도 많은 수의 장정들이 왔었습니다. 그들은 일을 시켜준다는 말에, 그러니까 결국 속아서 온 셈인데 아무튼 다들 같이 사역을 했습니다. 유사시 인적지원이라는 명목으로 평소에 일을 시킨 것이지요. 아무튼 위안소, 위안부, 죄수 등은 전부 제가 소속돼 있던 시설부대가 관리했습니다."
 
- 보통 시설부대라면 공병을 쉽게 떠올리기 마련인데 마쓰바라 씨가 있었던 곳은 사람도 관리했다, 그런 의미네요.
"그렇죠. 우린 시설부대니까 막사나 도로, 항만, 비행장 같은, 그러니까 토목건축도 다 했습니다. 그것도 하고 아까 말한 그런 것도 하고... 사실 뭘 짓고 그러는게 결국 노동력이 필요하니까요. 일본인 사역자들도 꽤 있었습니다. 물론 한국인들이 더 많았습니다만..."
 
- 시설부대가 위안소도 관리했다는 것인데 당시 위안소는 어떤 사람들이 드나들었습니까? 또 어떤 사람들이 일본군 위안부를 하고 있었나요?
"(겉옷 안쪽 속주머니에서 증명서를 꺼내며) 이게 남국료 출입증입니다."
 
- 남국료라면 아까 위안소라고 말씀하신...
"네. 그렇습니다. 저는 남국료를 담당했고 또 남국료를 사용했습니다. 이 출입증은 당시 실제로 사용했던 원본입니다. 계속 가지고 있었지요."
 
- 출입증 겉면에 적혀있는 내용은 어떤 의미입니까?
"여기 적혀있는 건, 먼저 가장 왼쪽이 남국료출입증,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있으면 남국료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하기와라 부대라고 씌여져 있습니다. 부대장 이름이 하기와라 간이치여서 하기와라 부대입니다. 인감이 그 밑에 찍혀 있지요. 원본인데 원래는 반납하지 않으면 안되는 건데 몰래 가지고 귀국했지요."
 
- 위에 이 번호는?
"그건 발급번호입니다. 갑제511호. 모두 이런 번호가 찍혀져 있습니다. 관리번호지요."
 
- 쇼와 18년에 발급받았네요.
"네. 서기로 따지면 1943년이고, 11월에 발급받았습니다. 발급날짜가 출입증 옆에 씌여져 있는 것이죠."
 
- 1943년이면 태평양전쟁이 한참 일어나고 있었던 때입니다.
"그렇죠. 전시상태였죠.(사이) 이듬해, 그러니까 1944년 2월 17일과 18일 양일간에 걸쳐 미군 폭격기의 대공습을 받았어요. 여기, 나쓰시마가 거의 궤멸됐습니다. 위안소도 물론 공습피해를 받았습니다."
 
- 대공습으로 사라질 때까지 위안소는 계속 있었나요? 그러니까 마쓰바라 씨가 처음 여기로 갔던 1942년에도 위안소는 있었던 겁니까?
"계속 있었습니다. 남국료와 남성료 둘 다 있었어요. 각각 5, 60명 정도 위안부 여성이 있었습니다. 남성료는 육군이 이용했고 남국료는 해군이 이용했습니다. 저는 제4함대 소속이었기 때문에 남국료를 이용한 것입니다. 여기(나쓰시마)는 또 함대기지였기 때문에 해군장병들이 특히 많았습니다. 언제 출격할지 모르니까 그 전까지는 마음껏 즐겨라 그런 분위기가 있었지요. 육군은 주로 하루시마(나쓰시마의 북쪽에 위치한 섬)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하루시마에는 죄수들도 같이 있었습니다."
 
▲  마쓰바라 씨가 직접 그린 당시 트럭제도 일대. 그의 증언에 따르면 지도 오른편에 보이는 나쓰시마(夏島)라는 곳에 두 곳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한다.  ©jpnews

 
- 아까 나쓰시마에 남성료, 남국료 둘 다 있다고 했는데요. 그럼 육군은 배를 타고 와서 위안소를 이용했다는 건가요?
"그렇죠. 거리상으로 그리 멀지 않으니까 조그만 배도 자주 왔다갔다 했습니다. 트럭제도 동쪽 4개 섬만 놓고 보면 위안소는 나쓰시마에만 있었으니까. 꼭 위안소가 아니더라도 하루시마, 후유시마(나쓰시마의 남쪽에 위치한 섬)에 주둔중이던 군인들은 자주 나쓰시마로 놀러 왔습니다."
 
- 놀러?
"아, 네. 여긴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요코스카 미군기지 같은 그런 개념인데요. 환락가가 있어요. 보통 상점들도 줄 지어 있고, 학교는 물론 신사까지 있었습니다. 일용품이나 그런 건 다 살 수 있어요. 술집이나 요정도 물론 있었지요."
 
- 그 군인들이 나쓰시마에 와서 놀았다는 것은 결국 다른 섬에는 그런 시설이 없었다는 거네요.
"네. 하루시마, 후유시마는 그냥 기지만 있었죠. 그러니까 다들 놀고 싶을 땐 나쓰시마로 건너 왔습니다."
 
- 위안소는 그런 군인, 군속들이 주로 이용했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 마쓰바라 씨도...
"네. 저도 물론 이용했습니다."
 
- 위안소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이용할 수 있었나요?
"영업시간은 기본적으로 12시부터 22시까지 였습니다. 22시에 일단 영업은 끝납니다. 단, 일반사병들은 18시까지만 이용하도록 돼 있습니다. 귀대해서 이것저것 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 외 하사관이나 장교, 저희같은 군무원들은 22시까지 이용할 수 있었고 또 자고 가는 것도 허용됐습니다."
 
- 위안소는 매일 운영됐나요?
"네. 매일 열었어요."
 
- 공휴일은 없었습니까?
"네. 그런 건 없었고, 다만 한 달에 한 번씩 성병검진이 있었어요. 위안부 여성들은 이 때만 영외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해군병원에서 검사를 받았으니까요. 해군병원은 위안소에서 한 2킬로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트럭으로 가면 금방 가지만 걸어서 갔어요. 어차피 도망가지 못하니까 천천히 걸어가면서 시원한 공기도 좀 쐬고 그래라 그런 것이었지요."
 
- 도망가지 못한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섬이니까요. 사방이 바다니까..."
 
- 하루 10시간씩 매일 그런 일을 강요해 놓고 한 달에 한 번 시원한 공기 쐬라고 인정 베풀 듯이 그랬다는 건 좀 그렇네요.
"해군은 위안부에 대해서 그나마 그런 감정같은 게 있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쯤은 그런 해방감을 맛봐라 그런 기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30일간 줄곧 한 군데서만 지내야 하니까. 그렇게 병원을 가는 위안부 여성들도 그 때만큼은 파라솔도 펴고 오랜만에 바깥구경한다고 즐거워했었습니다. 하지만 금방 또 같은 짓을 반복해야 하니까. 위안소로 돌아가는 그녀들을 보면서 저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무엇보다 다들 20살 안팎인 게 참 그 뭐랄까..."
 
- 하지만 마쓰바라 씨는 그녀들을 관리해야 하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그게 오히려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저에게 마음을 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고 또 눈물도 보였습니다. 가족들과 떨어져 있는 것이 너무 슬프다, 돌아가고 싶어도 못 돌아간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 돌아가고 싶어도 못 돌아간다는 무슨 말입니까?
"그건 그녀들이 위안소에 어떻게 왔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사실 위안부들은 모두 속아서 왔어요. 모집공고가 붙는데 위안부 모집한다는 문구는 그 안에 없습니다."
 
- 그럼 어떤 문구를 넣죠? 그 모집공고라는 것에.
"보통은 고급장교의 메이드(하녀)를 모집한다던가, 병원에서 사무 볼 사람을 찾는다는 그런 내용들입니다. 그러니까 위안부들은 결국 속아서 온 겁니다. 게다가 월급이 30엔, 숙박료도 식대도 필요없다고 하니까 다들 응모하는 겁니다."
 
- 월 30엔이면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얼마나 됩니까?
"지금 얼마나 할 지는 모르겠는데, 그 당시 초임, 그러니까 중학교 졸업하고 취직했을 경우 초임이 45엔이었으니까..."
 
- 30엔이면 꽤 높은 급료네요.
"그렇습니다. 30엔이면 상당히 좋은 수준입니다. 그러니까 다들 거기에 속아서 오는 겁니다. 30엔이나 받는데 숙박료, 식대 다 무료니까 아, 이 돈 모아서 고향에 부쳐주면 되겠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응모하는 겁니다."
 
- 연령대가 어떻게 되던가요?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보통 18세정도부터 많게는 25, 6살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아주 어려 보였습니다."
 
- 아까 한 위안소에 60명정도 있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약 120명이라는 말이 되는데, 국적은 어떻게 됩니까?
"일본인도 있었습니다. 그 외엔 전부 한국이었지요. 일본인 비율은 약 10% 정도였습니다."
 
- 90%가 한국인, 그럼 적게 잡아도 조선에서 속아서 온 여성들만 100명 이상이 있었다는 거네요.
"네. 그렇습니다."
 
- 아까 가족들과 떨어져 있는게 가장 슬프다 그런 말씀을 들었다고 하셨는데, 그 외엔 어떤 말들을 들었는지 혹시 기억나는게 있습니까?
"보통은 그런 말들인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일단 여기 와 버리면 끝이라는 겁니다. 인생이 끝나는 거예요. 속아서 남태평양 섬까지 왔는데 돌아갈 가능성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사방은 바다고... 결국 그녀들은 희망이 사라져버린 겁니다. 저는 군무원으로 왔지만 저조차 돌아갈 수 있을지 장담을 못했어요. 저만 해도 그런데 하물며 위안부들이 어떻게 자력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절망적이지요. 또 군에서 그녀들을 돌려보내지 않아요. 절대로."
 
- 그건 왜 그런 거죠?

"돌아가면 거짓말이 탄로나니까요. 고향에 가서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모집공고 거짓말이다, 속으면 안된다고. 그러니까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 그러면 평생 여기 있다가 죽어라, 뭐 그런 겁니까?
"그렇습니다. 평생 여기서 그렇게 강요당하다가 죽어가는 겁니다. 육군의 경우를 보면 작전지역에 위안소를 만듭니다. 작전기간 중에 짬을 내서 위안소를 이용하는 거지요. 그런데 작전이 끝났습니다. 후퇴를 해야 한다고 칩시다. 그럼 데려갈까요? 아니예요. 위안소도 위안부도 버리고 갑니다. 군대만 다른 지역으로 가는 겁니다. 아무 것도 없는 폐허가 된 땅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이지요."
 
- 섬은 더 고통스러울 것 같습니다.
"네. 실제 44년에 대공습이 있었습니다. 다 날아 갔어요. 위안소는 그나마 피해를 덜 받았지만 대부분의 청사, 창고 등이 폭격을 받았어요. 2000기가 떴으니까 엄청난 공습이었죠. 문제는 식료품이 사라졌다는 것. 물탱크도 박살났고... 하지만 섬이니까 도망칠 데가 없어요. 공습이 또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속에서 죽어가는 겁니다."
 
▲ 마쓰바라 씨가 활동하는 '아비코 평화네트'의 회원들도 인터뷰에 동석했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 마쓰바라 씨는 위안소 관련해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직접 이야기도 하고 그랬다니까 위안소 관련 업무를 전문적으로 했을 것 같은데요.
"네. 저는 제4해군함대 시설부대 경리과에 있었지만 위안소 관련해서는 직접 필요한 물건을 나르기도 했지요. 다른 일도 다 했습니다. 위안소를 위해서 특별히 뭘 했다 그런 건 없습니다."
 
- 아까 위안소 출입증을 보여주셨는데 그건 보급품이나 그런...

"아닙니다. 그건 위안소를 이용할 때 제시하는 증명서 같은 겁니다."
 
- 출입증은 일본군이라면 누구나 지급받았습니까?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출입증은 저같은 군무원만 받습니다. 군인은 이걸 보여주지 않아도 군복을 입고 있으니까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지요. 출입증이 필요없는 겁니다. 저희는 사복도 입기 때문에 이런 출입증을 발급받는 겁니다. 일반인들과 구별하기 위해서죠."
 
- 요금은 지불하나요?
"네."
 
- 얼마 정도인가요?
"잘 기억나지 않는데... 1, 2엔 정도였던 것 같네요. 아니, 아마 1엔이었던 것 같습니다."
 
- 일본 우익들 논리중에 하나가 위안부들이 성매매를 통해 상당한 돈을 벌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손을 내 저으며) 그건 말도 안되지요. 군인이 무슨 돈이 있다고."
 
- 요금은 위안부에게 직접 건넵니까?
"아뇨. 요금소가 있어요. 나쓰시마에 있었던 위안소, 그러니까 남국료, 남성료는 둘 다 길다란 단층짜리 막사 대여섯동이 죽 나열된 형태입니다. 1개 막사에는 보통 10개에서 12개 정도 방이 있는데 위안소 주위에는 울타리같은 게 쳐져 있어요. 정문에 가서 출입증을 보여주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방 번호표를 받아야 하는데요. 그 번호표를 주는 곳이 요금소라는 곳입니다."
 
- 방 번호는 뭡니까?
"위안부 여성들이 거주하는 방입니다. 막사 1개 동 내부구조를 보면, 길다란 복도가 하나 있고 그 복도를 따라 조그만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각 방마다 몇 호인지 적혀져 있어요. 복도 끝은 세면장과 화장실입니다. 방 크기는 하나당 4조(약2평) 정도? 왼쪽 구석에 매트리스 침대가 하나 있고 조그만 탁자가 하나 있습니다."
 
- 그럼 그녀들에게 직접 주는 건 아무 것도 없나요?
"네. 방 번호를 건넬 뿐이지요."
 
- 돈을 직접 건네지 않았다는 말이네요.
"돈은 요금소에 냅니다.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남국료는 그랬어요. 아무튼 그런 시스템이란 것을 생각해보면 그 돈이 실제로 위안부들에게 건네졌는지 아닌지 아무도 모르지요."
 
▲ 마쓰바라 씨가 직접 그린 위안소 평면도. 왼쪽에 요금이라고 적혀진 곳이 요금접수대이다. 군인, 군속들은 요금소 앞에서 길게 줄 섰다. 요금을 내면 방 번호표를 받고 오른쪽 복도를 지나 지정된 방으로 들어간다. 방은 다다미 4장 정도의 크기로 가재도구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복도 끝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 2부 - "군 부대가 위안소 관리했다" 구 일본군 군속 최초증언

 

"군 부대가 위안소를 직접 관리했다" (2부)
[단독인터뷰] 구 일본군 군속이 밝히는 일본군 위안소 충격실태
 
박철현 기자
("위안부들은 결국 속아서 온 거야" (1부) 에서 이어짐)
 
- 그러니까 요금소라는 곳에 돈을 지불했을 뿐이니까 실제로 위안부들한테 돈이 건네졌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런 말씀이네요.
"그렇죠. 다른 곳 이야기를 들어보면 육군위안소 중에는 위안부에게 직접 군표로 지불했다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지만 여기 위안소는 돈으로 냈습니다. 그리고 군표는 말이 군표지 일반사회에서 통용되는 화폐가 아니니까 사실 의미가 없다고 봐야지요."
 
- 마쓰바라 씨가 이용했다는 그 '남국료 위안소'에는아까 60명 정도 위안부가 있었다고 했는데 전체 군인들 수에 비해서 어떤 정도였나요. 위안소는 항상 붐볐습니까?
"네. 붐볐습니다. 항상 군인들로 바글바글거렸어요. 매번 줄을 서야 했으니까. (사이) 평면도로 그리면 이렇게 되는데..."
 
- 일반인은 사용하지 못하는 거죠?
"(평면도를 그리면서) 그렇죠. 일반인들은 바깥사회에 유곽 같은 곳을 이용하거나 공창이 있었으니까... (사이) 여기가 이렇게 울타리가 쳐져 있고, 입구가 이렇게 있으면 왼쪽에 요금소가 있고. 요금소 앞에 사람들이 줄을 길다랗게 늘어섰죠. 요금소 오른편에 길다란 동(棟)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1층짜리 길다란 막사인데 들어가면 길다란 복도가 나오고 끝에 세면장, 화장실이 보입니다. 물론 공용입니다. 복도를 쳐다보고 오른쪽에 방이 죽 나열돼 있습니다. 번호표를 든 사람들은 자기 방 번호표를 찾아가는 그런 방식이었죠."
 
▲ 마쓰바라 씨는 직접 위안소 평면도를 그렸다. 오른쪽이 마쓰바라 씨의 손   ©jpnews/야마모토히로키
 
- 이런 막사가 위안소 내에 몇 개나 있었습니까?
"대 여섯개 정도? 보통 한 막사에 방이 10개 정도였으니까요. 정문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한 동이 서 있고 뒷편으로 죽 나열돼 있었죠."
 
- 실제 방 구조는 어떻던가요?
"방 크기는 4조(다다미 4장 크기, 약 2평) 정도였습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 구석에얇은 판이 놓여져 있고 그 위에 매트리스가 깔려져 있었어요. 오른쪽 구석에는 위안부들이 자기 물건을 놔 둘 수 있는 조그만 탁자가 있었고 문 바로 옆에 경대가 있었나... 아무튼 그랬어요. 그 외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 아까 위안소 주변에 울타리가 쳐져 있다고 하셨는데, 그건 어떤 종류의 울타리인가요? 철조망같은 겁니까?
"아뇨. 그냥 외부와 구분하기 위해서 친 건데, 사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대충 만든 그런 형태였습니다."
 
- 바깥에서 들어올 수 있다면 안쪽에서 나가는 것도 가능했겠네요. 마음만 먹으면.
"하지만 남국료는 섬이니까 나가봤자 별 의미가 없지요. 그리고 경비원이 그 주변을 계속 돌았습니다. 위안부가 나가는 걸 막는다기 보다는 혹시라도 들어오는 사람을 제어하기 위한 건데... 그렇지만 아까 말씀드렸듯이 들어온다고 해서 무작정 하는게 아니라 요금소에 돈을 내고 방 번호표를 받아야 위안부들이 있는 방에 들어갈 수가 있으니까요. (들어와도)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 정리하자면 위안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요금소에 돈을 내고 방 번호표를 받아 위안소를 이용한다는 거니까, 위안부들이 돈을 직접 받았는지 아닌지는 모른다는 것이죠?
"네. 어떻게 배분했는지 그런 건 저희들은 모릅니다."
 
- 그런데 아까 마쓰바라 씨는 위안소를 시설부대가 관리했다고 했는데요.
"위안소 자체는 군부대가, 그러니까 나쓰시마 위안소는 우리 부대가 관리한 게 맞지만 시설운영 자체는 민간업체에 위탁해서 했으니까 요금이 어떻게 분배되고 그런 구체적인 부분까지는 모릅니다."
 
- 그 민간업체 이름이나 그런 건 기억나십니까?
"음, 그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 시설부대에서 그 쪽 관련 계약이나 그런 건 어디가 담당했습니까?
"위안소에 관련된 사항은 시설부대 서무과가 담당했습니다."
 
- 이 남국료출입증도 그럼 서무과가 발급했겠네요.
"네. 그렇습니다. (출입증 나이란을 가리키며) 사실 이 나이도 거짓말인데요. 여긴 22살이라고 적혀 있지만 이 때 제 나이는 19살이었어요. 왜 그랬냐면 20살이상이 아니면 위안소 이용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제가 서무과로 찾아가서, 선물 같은 걸 가지고 간 것 같은데... 아무튼 좀 잘 봐달라 그런 식으로 얘기해서 이걸(출입증) 발급받았지요."
 
- 나이가 차지 않은 다른 사람들도 다들 그렇게 하면 발급받을 수 있었다, 그런 건가요?
"모두가 그런 건 아닙니다. 저같은 경우는 부서는 달라도 같은 부대에서 비슷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으니까 얼굴을 다 알고 있지요. 그러니까 발급해 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보통 20살 이전 어린 병사들이 위안소를 이용하고 그러면 안된다 그런 분위기도 있었으니까... 거짓말로 발급받은 건 제가 알고 있는 범위내에선 저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 마쓰바라 마사루  ©jpnews/야마모토히로키
- 어떻게 보면 규칙을 어긴 셈인데, 왜 그러신 건가요?

"그 땐 위안소 실태를 알고 싶다 그런 생각이 있었던 건 전혀 아니고, 그냥 그걸 해결하고 싶었지요."
 
- 요금 문제를 제외한 위안부들의 처우는 어땠습니까? 보통 직장이나 군대도 평시훈련중에는 1시간에 10분 휴식하고 그러는데요.

"그런 건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 영업이 시작되면 무조건 군인들을 받아야 했고 군인들이 없더라도 언제 올 지 모르니까 계속 대기해야 했으니까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휴식시간은 없다고 봐야 겠지요."
 
- 군인들은 어땠나요? 시간제약 그런 건 있었습니까?
"네. 그런데 시간이 길고 그러지 않아요. 10분에서 20분 정도? 욕구만 해결하고 바로 나오는 그런 겁니다. 여운에 빠져 있거나 그럴만한 시간이 없었습니다. 뒷 사람이 기다리는 것도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군인들은 외출할 때 반드시 콘돔 2개를 지급받았습니다. 혹시라도 임신하거나 성병에 걸리면 큰일나니까 그걸 예방하기 위해서 받는 것입니다."
 
- 콘돔은 외출할 때 무조건 지급받는 겁니까?
"네. 무슨 신청서를 쓰거나 그러는게 아니라 무조건 다 주는 겁니다. 외출 나가면 위안소에 가라는 말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전부 가는 것도 아닙니다. 위안소에 안 가는 그런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런 이들은 콘돔을 버리거나 그냥 놔두거나 그랬지요."
 
- 합해서 120명의 위안부가 있었습니다. 군인들 수는 몇 명 이었습니까?
"그건 유동적이었습니다. 나쓰시마는 함대기지니까 바다에서 죽지 않는 이상 이쪽에 모이게 됩니다. 함대가 집결할 때는 군인 수가 늘어나고 다시 바다에 나가면 줄어들고 그랬으니까... 평균 잡아서 3, 4만명 정도였다고 봅니다."  
 
- 3, 4만명을 위안부 120명이 상대했다는 거네요.
"그런 셈입니다. 제가 생각해 보면 위안부 여성 한 명당 하루 평균 14, 5명을 받았을 거라고 봅니다. 훈련이 없을 땐 위안소가 붐비지만 훈련시에는 또 비게 되니까. 그걸 다 평균내면 14, 5명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 마쓰바라 씨는 1942년에 시설부대로 배치받았다고 했습니다만 이 때 이미 이런 위안소가 있었습니까? 왜 이런 걸 물어보냐면 보통 우익들 하는 말이 위안소가 있었다 하더라도 전쟁말기에 조금 있었거나 다들 공창이었다, 그러니까 자기네들이 원해서 돈 벌러 온거다 라면서 일본군 위안부가 성적학대를 받는 성노예라는 사실을 부정하거든요.
"그건 말이 안되는 것이지요. 공창은 환락가에 따로 있었으니까요. 나쓰시마만 하더라도 그런 공창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 위안소는 막사가 설치되고 무엇보다 시설부대 관리하에 있었습니다. 또 제가 배치받았던 42년에 이미 이런 위안소가 존재하고 있었어요. 이 출입증은 43년으로 돼 있습니다만, 42년에 있었던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42년에도 있었지만 종군위안소 자체는 중일전쟁 때부터 있었지요. 이건 제가 경험해 보지 않아서 확실하게 말씀드리지 못합니다만 태평양전쟁 전부터 있었던 건 사실인 듯 합니다.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중일전쟁 당시 강간사건 같은게 많이 발생했지요. 그게 이제 문제가 되니까 그럼 아예 이런 시설을 만들자, 그런 발상에서 출발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 아까 44년에 대공습을 받았다고 하셨는데요. 그 이후에 위안소는 어떻게 됐습니까?
"위안소는 다행히도 공습을 피해 갔습니다. 하지만 다른 곳들이 전부 폐허가 돼 버려서 위안부들은 전부 스스로 먹거리를 조달해야 했습니다. 고구마감자 같은 걸 재배하거나 근처 해안가에서 생선을 잡았죠. 위안부들의 자급자족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됐습니다. 이 때 저는 공습직후인 4월에 본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만 나중에 그렇게 들었습니다. 위안부 여성들은 그게... 그러니까 44년 7월 사이판이 완전히 함락된 이후에 돌려보냈다고 그러더군요."
 
- 돌려보냈다는 건 어디로 돌려보냈다는 겁니까?
"본국이지요."
 
- 본국이라면 한국을 말하는 겁니까?
"아뇨. 일본입니다."
 
- 어떤 루트를 통해 일본으로 돌아왔을까요?
"그게 상당히 불분명한데 제 예상으로는 아마 병원선(病院船)을 탄 게 아닐까 합니다. 저도 병원선을 타고 귀국했으니까요. 나쓰시마는 비록 공습은 받았지만 전부가 몰살한 건 아니니까요. 병원선도 간혹 왔다갔다 하고 했습니다. 여성군속, 거류민들도 있었으니까요. 그들과 함께 귀국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 위안소에 대해서 좀 더 듣고 싶습니다. 특별히 생각나는 위안부 여성이 혹시 있습니까?
"음... 네. 자주 만났던 위안부는 22살이었는데 이름이 '미도리'였습니다."
 
- 일본인 위안부인가요?
"아뇨. 한국에서 온 위안부인데 본명은 모르고 위안소에서는 미도리로 불렸던 여성입니다. 솔직한 성격이었습니다. 그녀를 기억하는 이유는 저같은 경우엔 잡무가 많아서 보통 밤늦게 위안소를 갔습니다. 군무원은 숙박이 가능했기 때문에 위안소에서 자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때 그 여성과 함께 있었지요. 꽤 여러 번 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 같이 밤을 지새고 또 그게 여러 번이었다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할 것 같습니다만.
"그렇죠.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가족 이야기, 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또 그렇게 제가 숙박을 하게 되면 다른 방에서, 그러니까 영업시간은 끝났고 숙박 군인이 없는 위안부 여성들이 미도리 방으로 건너 왔어요. 꽤 여러 명이 와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 마쓰바라 씨가 직접 사용했던 위안소 출입증 사본. 오른쪽이 앞면, 왼쪽이 뒷면이다. 원본은 이쪽 링크(http://jpnews.kr/sub_read.html?uid=4576에서 확인할 수 있다.     ©jpnews/박철현
 
-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하던가요?
"기본적으론 아까 말했던 그런 것들입니다. 다들 울면서 가족들과 헤어진 아픔, 슬픔을 이야기하는 건데 한국인들은 가족을 생각하는 그런 것이 상당히 있으니까요. 이제 못 간다, 영원히 못 만난다 그런 말들을 하면서 우는 겁니다. 아까 그 미도리라는 이름의 여성은 저에게 소포를 부쳐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는데 그 때 그 여성의 주소와 본명이 적혀져 있었습니다. 다른 종이에 그것들을 옮겨 적어 놓고 부쳤어야 했는데 그냥 우체통에 넣어버린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쉽고 그러네요. 만일을 생각해서 적어 놨어야 하는 건데 말이죠."
 
- 그 소포는 어떤 소포입니까?
"안은 확인해보지 못해서 모릅니다. 두꺼운 봉투였습니다. 아마도 고향집에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도리는 자기는 못 돌아가니까 저한테 일본으로 돌아가면 꼭 부쳐달라고 하더군요."
 
- 미도리라는 분의 본명이나 주소 같은 건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까?
"사실은 저도 군무원이니까. 원래 그런 부탁을 받으면 안됩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쉽고 미안하지만 그 때는 그런 것을 적어두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금방 머릿속에서 지웠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도 주소도 들었습니다만, 전혀 기억이 안 나네요."
 
- 공습후 위안부 여성들은 자급자족을 했다고 하셨는데, 공습전에는 어떻게 식사같은 걸 해결했나요?
"식사는 시설부대에서 했고, 잠은 그 위안소에서 자고 그랬습니다."
 
- 위안소나 시설부대에서 잡역을 하던 장정들 말고 다른 한국인들도 있었습니까?
"거류민으로 와 있는 한국, 조선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위안부 여성들을 보는 일반인들의 시선은 어땠나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마 접점 자체가 없으니까 위안부라는 존재자체를 몰랐었을 가능성도 있지요. 군인과 군속들만 (위안부와) 접촉했으니까요. 또 일반인들은 위안소를 사용할 수 없었고 성욕을 해결하려면 환락가에서 따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 아까 말씀하신 공창 같은 곳을 의미하는 건가요?
"그렇죠. 거기가 사실 중요합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위안소는 공창하고 전혀 다릅니다. 위안소는 완전히 따로 격리된 곳입니다. 매일 일해야 하고 한 달에 한 번만 외출이 가능합니다. 외출도 성병검진을 위한 거니까 그냥 병원과 위안소를 왕복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위안소로 다시 돌아오면 바로 일을 해야 하니까 쉰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고 봐야지요."
 
- 위안부가 120명 정도 된다고 했는데 그 숫자는 변함없었나요? 새로 사람이 오면 그만큼 준다거나 그런 건 있었나요?
"제가 나쓰시마에 주둔하기 시작한 때가 정확하게 43년 11월인데 이 때는 60명 수준을 유지했습니다. 목표기준이란 것이 있었는데 그 목표기준이 5, 60명 이었으니까요. 그 전에는 남국료 위안소가 어땠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점점 더 늘어나 70명 이상 됐던 것 같습니다."
 
- 늘어났다는 건 원래 있던 분들은 그대로 있고 더 추가됐다는 겁니까?
"그렇지요. 기존 멤버는 계속 있는 겁니다. 괌 자료를 보면 나중엔 300명까지 늘었다 그러는데 그건 좀 아닌 것 같고 아무튼 시간이 지나면서 더 늘어난 것은 확실합니다."
 
- 솔직한 마음을 듣고 싶습니다. 당시 군인이나 군무원들, 그러니까 위안소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위안소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나요. 위안부들이 불쌍하다는 인식같은 건 있었나요?
"전혀 없었습니다. 저만 해도 그랬던 것이 당시 일본에는 공창제도가 있었거든요. 때문에 군 위안소도 공창과 같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아무런 저항감이 없었어요. 그 땐 지금과 달라서 보통 직장에서도 회식하고 단체로 공창에 가고 그랬거든요. 그런 문화사회적으로 인정됐던 것이죠. 쇼와 31년(1956년)에 공창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다들 그런 감각이었어요. 지방에 출장갔다 돌아오는 길에 역 주변에 있는 공창촌에 들러 여행의 때를 벗긴다는 게 당연한 시대였으니까요. 저는 위안소를 이용하면 숙박을 자주했기 때문에 아침에 귀대를 했습니다. 그러면 '야노'라는 해군 중좌(중령)가 저를 불러서 '너 말이지, 너무 그런 곳 가는 게 아니다'라고 꾸중하기도 했어요. 사고방식 자체가 그랬으니까 그 때는 위안소에 간다는 것이 부끄럽거나 그랬던 건 없었습니다."

- 그 상사는 어떤 의미에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아, 그건 단순히 제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그런 곳에 자주 가기 보다 군무에 힘을 써라, 그런 의미에서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 위안부 여성들과 연애감정을 느끼거나 그런 건 있었습니까?
"그런 사례도 있었습니다. 제가 그랬다는 건 아니고 한국출신 죄수와 위안부 여성이 같은 고향 출신이라서 같이 도망갔다는 사례보고가 올라온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 마쓰바라 씨가 도망가게 해 줬다거나...
"그건 없습니다. 그랬다간 큰일나지요. 또 섬이라는 것도 있었고. 제가 할 수 있는 건 우편물을 우체통에 넣어주거나 그녀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 정도 밖에 없었습니다.  
 
- 죽은 사람은 있습니까?
"폭격을 받아 몇몇 위안부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제가 확인한 것은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린 위안부들의 귀환 역시 제가 본 것이 아니니까 무사히 돌아갔는지 아닌지 확실치 않습니다."
 
- 임신한 사례는 있습니까?

"제가 들은 바로는 없습니다."

- 만약 임신하면 어떻게 처리하도록 돼 있습니까?
"중절시키는 게 일반적입니다. 위안부가 임신한 케이스는 버마(현 미얀마)에서 있었는데 결국 사산했다고 하더군요."
 
- 마쓰바라 씨는 구 일본군 군속 출신으로 실제 위안소를 이용하기도 했고 또 그 위안소를 관리하는 부대에서 근무하셨는데요. 지금은 '아비코 평화네트' 등 시민단체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계시고 오늘은 귀중한 증언까지 해 주셨습니다. 무엇이 계기로 작용했나요?
"위안소 문제는, 오늘 제가 경험한 것을 공식적으로 말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그간 노랫말을 짓거나 해서 위안부들의 심정을 노래로 표현해 왔습니다.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며) 이게 제가 지은 노랫말인데 제목이 '종군위안부'입니다."
 
▲ 마쓰바라 씨가 직접 지은 노랫말.  제목은 '종군위안부' 노랫말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속았다고 눈물 흘리는 위안부를 때리는 저 차가운 바람은 오늘도 멈추지 않아 / 탄식하는 모습 또렷히 남아있는 위안부는 어느새 백발이 되어 오늘도 괴로워한다 / 다테야마(館山)의 종군위안부 비석이 부르는, 적도에서 원한속에 죽어간 여성 / 보소(房總) 바다 저편 먼 언덕에서 들려오는 통곡의 비석 '의 종군위안부'"    ©jpnews/박철현
 
- 이건 언제 지으셨나요?
"그 옆에 날짜가 나오는데, 2005년 1월에 만들었네요. 그때 nhk가 종군위안부 관련 다큐멘터리를 방송한 적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 뭐랄까, 위안부의 비참한 삶을 제대로 보도하기는커녕 방송내내 역사를 왜곡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화가 많이 났습니다. 보도기관이 역사를 왜곡한다면 그걸 까발리는 것을 제 나름대로 해야 겠다고 생각해서 이 노랫말을 지은 겁니다."
 
- 어떤 내용입니까?
"제가 직접 경험했던 위안부들의 삶을 옮긴 것에 불과합니다. '속았다고 눈물 흘리는 위안부들을 때리는 저 차가운 바람은 오늘도 멈추지 않아...'라는 식으로 나갑니다."
 
- 제가 묻고 싶은 것은, 그러니까 nhk의 방송을 보며 화가 났다고 하셨는데 그 화가 왜 났을까라는 부분입니다. 언제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됐는지가 궁금합니다.
"아, 그건 예전부터 반전운동도 줄곧 해 온 것도 있고 또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듣고 참 죄송스럽다는 마음이 들었지요.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1998년 당시 농수산 대신이 종군위안부는 없었다라고 발언한 것이 컸습니다. 제가 위안소를 이용했고 관리하는 입장이었는데 종군위안부가 없다니 그게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런 거짓말을 태연하게 하는데 그냥 있어선 안되겠습디다."
 
- 용기를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중요한 증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증언이라기 보다 그냥 당사자로서 이런 부분이 감추어져선 안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제 지인들에게는 조금씩 말했습니다만... 사실 그거 여성에게 있어 가장 억울하지 않을까요. 자신의 성을 무참하게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의 물리적 힘에 의해 빼앗겨버렸다는 것이 얼마나 원통하겠습니까. 부모는 물론이거니와 남편, 아이들이 있는 위안부도 있었으니까 언젠가는 말해야 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게 마침 오늘이었을 뿐입니다."
 
- 긴 시간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이 인터뷰는 2010년 4월 21일 지바 현 아비코 시내 모처에서 이루어졌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끝)

 

 

임영신

1899 충남 금산~ 1977 서울

호는 승당(承堂). 1930년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을 거쳐 1931년 동대학원을 수료했다. 1957년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 1962년 롱아일랜드대학, 1971년 일본대학(日本大學) 등에서 명예학위를 받았다. 1933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총무를 지냈고 1945년 중앙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으며, 1946년 중앙여자대학(지금의 중앙대학교)을 설립, 학장에 취임했다. 1946년 남조선 민주의원 의원, 1948~49년 초대 상공부장관, 1948년 제헌의회 의원, 1950년 제2대 민의원, 국제연합(UN)총회 한국대표를 지냈다. 1953~61년 중앙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1963년 민주공화당 총재고문, 1961~74년 한국부인회 회장, 1963~71년 중앙대학교 총장, 1965~72년 대한교육연합회 회장, 1966년 세계교직자연합회장, 1969년 재건국민운동중앙회 부회장을 지냈다. 1971년 민주공화당 고문, 대한교원공제회 초대 이사장, 1972년 중앙문화학원 이사장, 국민의회 대의원 및 운영위원을 지냈다. 저서로 〈내가 한국을 위해서 분투했던 40년 My Forty Years Fight for Korea〉이 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청조근정훈장 및 미국 아이젠하워 상을 수상했다

 

 

 김활란

1899 경기 인천~ 1970. 2. 10 서울.

기해년(己亥年)에 태어나서 '기득'(己得)이라고 불렸으며 '활란'(活蘭)이라는 이름은 세례명인 헬렌을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다. 호는 우월(又月). 기독교적 가풍에서 독실한 신앙인으로 자랐다. 1907년 제물포에서 서울로 이사하여 이화학당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1918년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근무하였으며, 이화학당 재직중에 3·1운동을 맞았다. 1922년 7월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에 편입하였다. 1924년 6월 문학사학위를 받고, 그해 10월 보스턴대학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하여 〈철학과 종교의 관련성〉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25년 여름 호놀룰루에서 열린 제1차 태평양문제연구회의(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에, 1927년 역시 호놀룰루에서 열린 제2차 태평양문제연구회의에 참석하였고, 1928년 미국 캔자스 시에서 열린 감리교 총회에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는 등 종교·사회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하였다. 1928년 4월 예루살렘에서 열린 국제선교회의에 신흥우·홍병선 등과 함께 참석하여 일본대표와 논쟁을 벌여 찬사를 받기도 했다. 1930년 미국 콜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1931년 10월 우리나라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25년부터 이화여대 교수 및 학감 직을 맡고 있었는데 박사학위 취득 후 귀국해서는 부교장직도 겸했다. 1939년 4월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이화보육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1945년 문리과대학을 한림원으로, 음악·미술대학을 예림원으로, 의예과·간호과·약학과를 종합한 예과대학을 행림원으로 편성하였고, 1946년 8월 15일 종합대학으로 설립인가를 받았다. 1961년 9월 30일 김옥길에게 총장직을 물려주고 명예총장과 이사장직을 맡아 이화여대에 대한 자체조사연구로부터 시작하여 이화 10년 발전계획을 추진하였다. 해방 후 구성된 교육심의회 위원으로 교육이념 분과에 참여하였고, 교육심의회보다 먼저 구성된 한국교육위원회에서 여자교육 부문을 맡아 여성교육 이념 확립에 힘썼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피난을 가서 적십자사 일을 보았고 이어서 공보처장직을 수행하였다. 그가 관련을 맺었던 단체는 50여 개에 달했는데 1922년에 창설된 기독교청년회연맹(YMCA), 1950년에 설립된 대한민국여학사협회, 1959년에 조직된 여성단체협회에서의 활동이 대표적인 것이다. 1960년 4월 19일 김활란 전도협회를 조직하여 교파를 초월한 범기독교적 운동을 전개하였고, 1964년 10월 16일 한국복음화운동의 기틀을 위한 발기대회를 열어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1년 동안 추진했다.이것은 1968년의 새시대 복음운동으로 퍼져나갔다. 1963년 교육 부문 대한민국상, 필리핀에서 주는 막사이사이상(공익 부문), 미국 감리교회에서 주는 다락방상을 수상하였다. 1964년 5월 미국 웨스팅 하우스의 타임캡슐에 넣을 자료편찬의 교육 부문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65년 9월 대한민국 순회대사로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활동했으며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1970년 대한민국일등수교훈장이 추서되었다.

 

 

 - 김활란의 친일행위는 1937년 이화여전 부교장 시절부터 시작된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식민지 조선을 전쟁기지로 만드는 시점이다. 김활란은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일제의 침략전쟁에 금비녀를 뽑아 바치는 이 단체에 가담한 것은 명백한 반민족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이후 그의 이름은 조선부인연구회,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조선교화단체연합회,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조선언론보국회 등 일제가 만든 온갖 단체의 간부직에 가장 자주 오르내렸다.
  
  그런 가운데 1938년 6월 20일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4백명 처녀들로 '총후보국을 내조'한다는 애국자녀단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부인총궐기촉구강연회, 시국부인강연회, 학병권유계몽독려반 강연 등 전국을 돌며 일본의 침략전쟁에 협조하는 연설을 하고 다녔다. 야마기 카쓰란(人城活蘭)이라고 창씨개명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1938년 6월 8일 조선 YWCA를 일본 YWCA에 통합시키는데 앞장섰다. 이 때 회장이 김활란이었다.
  
  <학병, 징병을 권유>
  
  -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이후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지원병제에서 나아가 징용, 징병, 정신대 등의 강제 연행을 시작하였다. 동시에 식민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선전하기 위해 각종 친일단체를 결성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까지 앗아가려는 온갖 책동을 다하였다.
  
  그는 각종 친일단체의 간부로서 부인궐기촉구강연, 결전부인대강연, 방송 등을 통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내선일체, 황민화 시책을 선전하며 일반 여성이나 여학생들에게 '어머니나 딸, 동생으로서' 징병, 징용, 학병 동원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였다.
  
  확장되는 전선을 일본인 군인으로만 막을 길이 없자 전면적인 징병제를 실시하여 조선의 남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삼고자 한 결정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감격하였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반도여심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징병제와 반도 여성의 각오', 신세대 1942. 12)
  
  '학도병 출진의 북은 울렸다. 그대들은 여기에 발맞추어 용약(勇躍) 떠나련다! 가라, 마음놓고! 뒷일의 총후(銃後)는 우리 부녀가 질 것이다. 남아로 태어나서 오늘같이 생의 참뜻을 느꼈음도 없었으리라. 학병제군 앞에는 양양한 전도가 열리었다. 몸으로 국가에 순(殉)하는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었다.'('뒷일은 우리가', 조광 1943.12)
  
  이밖에도 그는 신문, 방송, 강연을 통해 일제의 앞잡이로서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정책을 선전하며 우리의 젊은이들을 징병, 징용 학병으로 내보내는데 앞장을 섰다.
  
  1944년 악성 안질에 걸려 실명할 우려가 있다는 의사의 말에 "남의 귀한 아들들을 사지(死地)로 나가라고 했으니, 장님이 되어도 억울할 것 없지… 당연한 형벌"이라고 말하였다 한다.(김옥길의 '김활란 박사 소묘')
  
  해방 후 김활란은 대부분의 친일경력을 가진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택한 정치세력은 '친미반공'을 내세운 정치권력과의 밀착이다. 그는 단 한번도 독재권력과 맞서 싸운 적이 없다. 오히려 정권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수족으로 활동하였다.
  
  김활란은 분명 탁월한 역량을 지닌 여성 지도자다. 그러나 그 탁월한 역량은 한국근대사가 굴절을 겪는 주요 고비마다 다수의 한국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수의 지배권력을 위해 발휘되었다.
  
  경찰이나 군대, 행정기관에 소속되어 항일운동가와 민족성원을 탄압한 사람들과는 다르지만, 문화, 교육가로서 일제에 협력한 그의 역할은 결코 가벼울 수 없는 만큼 그가 민족사에 남긴 오점은 분명히 해야 한다.
  
  <종별 건명 또는 연재>
  
  - 1941년 7월 5일 '애국정신에 빛나는 총후의 각오'
  - 1941년 9월 19일 '부인 생활정의 강연' : '전조선 6반을 파견'
  - 1941년 11월 26일 '국민총력중앙이사회석 담' : 담화
  - 1943년 5월 5일 '가정도 전장이다' : 방송
  - 1943년 6월 27일 '남자에게지지 않게 큰 결의를 갖고 있다'
  - 1943년 8월 7일 '적 격멸에 일로 매진' : 매일신보 논문
  - 1944년 6월 27일 '감격과 중한 책임'
  
  <인용저서>
  -친일파 99인, ②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275~283p), 저술자 : 강정숙(영남대 강사, 여성학,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친일파 99인, ③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부록2 일제하 친일단체 및 기관 소속 주요인명록, 268, 269, 279p)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 (민족정기의 심판 : 47, 48p, 친일파 군상 : 354, 386, 387, 431, 442, 443, 447, 448, 452p)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찬(108~109p)

 

 

 

고황경

고황경(高凰京, 1909년 3월 6일 ~ 2000년 11월 2일)은 한국의 사회학자이며 대학교수이다. 아호는 바롬이다 .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고명우의 딸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독립 운동가 김마리아는 외가쪽으로 먼 친척이 된다.[1]

고황경의 가정은 4대째 개신교를 믿어온 집안[2] 이었으며, 비교적 여유 있는 환경이었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일본의 도시샤 여자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했다.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근무하면서 소녀 범죄에 대한 논문으로 미시간 주립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조선총독부의 조선부인문제연구회에 가담하면서 친일 단체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 단체는 총독부의 정책을 홍보하고 계몽하는 여성 단체였으며 지역별로 순회 연사를 배당했는데, 고황경은 홍승원과 함께 호남 지역 강연을 담당했다. 역시 총독부에서 발족시킨 방송선전협의회의 방송 강좌에도 참가했고, 윤덕영의 부인 김복수가 회장을 맡은 애국금차회 간사와 조선임전보국단 임원으로서 태평양 전쟁 기간 중 연설과 좌담회로 전쟁을 적극 지원했다.

광복 후 1945년 경기여고 교장, 1946년 미군정의 보건후생부 부녀국장에 임명되었다. 언니인 고봉경은 이때 미군정 경무국의 초대 여경과장을 지냈다.[3] 한국 전쟁 때 아버지인 고명우와 언니 고봉경은 납북되었다.

고황경은 한국 전쟁 이후 몇 년간 영국에 머물면서 활동하다가, 귀국하여1961년 장로교 교단의 오랜 숙원이던 서울여자대학교를 설립해 초대 학장과 명예총장을 맡았다. 대한어머니회 초대 회장, 한국 걸스카우트 연맹 단장, 대한민국학술원 종신회원을 역임했다.

 

고황경의 친일행적
  
  <<황도정신 선양에 앞장선 여성 사회학자>>
  
  <박사학위 받고 귀국 직후부터 식민지 사회교육에 가담 협조>
  
  -고황경은 일제시기에 일본과 미국의 대학에 유학했으며 일본에서는 영문과와 법학부를 졸업했으며, 1937년 미국 미시간대학 대학원에서는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그는 이화여전 교수로 재직하게 되나 1937년부터 바로 친일집단에 가담 협조하는 행적으로 남기고 있다. 일제가 식민지 정책을 강화하는 사회교화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각종 어용단체를 조직토록 했다.
  
  그 일환으로 1937년 1월 총동부 학무국 알선으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가 조직됐다. 이 단체는 총독부의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책'에 호응하여 '가정보국운동으로서의 국민 생활의 기본양식'이라는 것을 제정했다.
  
  전시에 맞게 가정생활을 간소화하는 것이었는데, 이 단체는 신진 여성을 총망라해 매월 마지막 토요일을 회합일로 정하고 생활개선부와 수양부를 두어 활동했다.
  여기서 고황경은 중요한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 단체의 활동을 선전 계몽하기 위해서 11명으로 구성된 순회강연반을 결성하여 1938년 9월 12일부터 13도를 순회강연했으며, 그는 전남북을 맡아 강연했다.
  
  1937년 1월 총독부 사회교육과가 주동해서 '방송선전협의회'가 발족됐는데 이 역시 '일본 국민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 즉 내핍과 절약을 전쟁을 이겨내고 신명을 천황께 기꺼이 바치게 한다는 사회교육을 수행하게 할' 목적으로 수양강좌, 부인강좌, 상식강좌 등의 방송강좌를 실시했다. 여기에도 고황경은 부인강좌를 맡는 역할을 했다.
  
  <애국금채회 간사로 활약>
  
  -조선부인문제연구회에서 활약하던 고황경은 '애국금채회'의 간사를 맡게 됐다. 1937년 8월 16일 조선중양정보위원회의 권유로 귀족의 처와 중견여류를 망라해서 결성된 이 단체는 한마디로 말해서 금비녀 금가락지를 뽑아 일제의 국방비로 헌납하자는 전쟁협력단체였다.
  
  동시에 애국금채회는 '황군원호'를 목적으로 하면서 황군의 '환 송영, 총후가정의 위문 격려, 총후가정의 조문, 일반 조선부인에 대한 황군원호의 강화 및 국방비의 헌납 등을 사업계획을 정했으며 육군병원 방문, 위문금 전달, 국방헌금, 장병위문을 실시했다.
  
  1939년 9월 10일 '동양지광' 주최의 '내선일체 좌담회'에 참여했으며 1941년 '채권가두유격대'에 서대문대로 편성되어 우체국 앞에서 신흥우, 주요한 등과 함께 채권을 판매했다.
  
  1942년 1월 5일 조선임전보국단의 산하기관으로 이른바 총후부인 진영을 총망라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가 발족됐는데 고황경은 이 단체의 지도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1943년부터는 지원병과 학병을 권유하는데도 앞장섰다. 이러한 활동의 일환으로 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자에 '징병감사와 우리의 각오, 건군정신에 투철'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해방이 되자 고황경은 다른 친일 여류명사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자기반성 없이 분단 조국의 교육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또 미군정하에서는 보건후생부 부녀국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1960~63년에는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참석했으며, 1961~84년 서울여대 학장, 학술원 종신회원을 역임하였으며, 대한민국문화대상 국민포장 동백장, 5.16 민족상을 수상했다.
  
  <인용저서>
  -친일파 99인 ②,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284-288p), 저술자 : 장하진(충남대 교수. 사회학)
  -친일파 99인 ③,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부록2. 일제하 친일단체 및 기관 소속 주요 인명록, 270p)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 (민족정기의 심판: 35, 53p, 친일파 군상 : 391, 443, 445p)

 

 

 

 

 

 

 송금선

송금선(宋今璇, 일본식 이름: 福澤玲子(후쿠자와 레이코), 1905년 1월 15일 ~ 1987년 2월 24일, 한성부 출생)은 덕성여자대학교 초대 학장을 지낸 한국의 교육자이다. 아호는 남해(南海).

[편집] 생애1919년 숙명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했다.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모교와 진주일신여자고등보학교,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를 거쳐 1934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1937년 조선부인문제연구회에 가입하여 순회 강연을 다니면서부터 친일 활동을 시작했다. 그해 조선총독부의 방송선전협의회에서 친일 강좌를 맡았고, 조선귀족 부인들과 여성계 친일 인사들이 공동 조직한 애국금차회에도 가담했다.

전시체제 하에서 송금선의 친일 행적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활동하고 친일 잡지 《신시대》에 기고하는 등으로 계속된다. 친일 단체의 총본산격인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에 가입하였고, 학병으로 지원할 것을 독력하는 연설 활동에도 적극 참가했다. 종전 직전 패전이 가시화되자 본토에서 최후의 1인까지 싸울 것을 독려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이 되기도 했다.

1940년 총독부의 지지 하에 차미리사의 뒤를 이어 덕성여자실업학교(현 덕성여자고등학교의 전신) 교장이 되었고, 1950년에는 현 덕성여대의 전신인 덕성여자초급대학을 세우고 초대 학장에 취임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도 선정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덕성여대 이사장을 지낸 박원국이 송금선의 아들이다.

 

 

송금선의 친일 행적
  
  <채권가두유격대>
  
  -1941년 9월 7일 임전대책협의회에서는 '이로써 실천으로!'라는 슬로건을 세우고 동회원 70여명을 총동원하여 채권가두 유격으로 나섰다. 70여명을 시내 11개 장소로 배치시켜 '총후봉공은 채권으로부터'라고 외치며 추태를 연출했는데 송금선은 정교원, 이돈화, 박기효(朴基孝), 김사연, 김사연의 부녀 손홍원(孫弘遠)과 함께 경성 역대로 나서서 가두 판매했다.
  
  <국민정신선양 각도 강연 행각>
  
  -1939년 8월 5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서는 이달과 내달 중에 각 도로 강사를 파견하여 국민정신 선양에 관한 순회강연을 열기로 됐다. 강연할 연제는 시국진전에 대한 인식과 결심, 총동원 운동의 본위, 백억저축생활 쇄신에 관한 것들이며 강사들은 남자 18명, 여자 8명으로 조선 각처로 강연을 다니리라고 한다. 여자부는 송금선, 조기홍(趙圻烘), 이숙종, 손정규(孫貞圭), 홍승원, 유각경(兪珏卿), 차사백(車士伯), 임숙재(任淑宰)이다.
  
  <부인궐기촉구 강연>
  -1941년 9월 19일 총독부 학무국 연성과내에 있는 조선교화단체연합회에서는 12월 2일을 기해 저명한 부인강사를 각지에 파견해 전국 인식과 징병징용제의 취지를 철저히 하는 순회강연을 하기로 했는데 송금선은 경기도 강사였다.
  
  <인용저서>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 (민족정기의 심판: 35, 54, 130p, 친일파 군상 : 391, 437, 450, 454p)

 

 

 

 황신덕

 

황신덕(黃信德, 1898년 ~ 1983년 11월 22일)은 추계예술대학교 설립자인 대한민국의 교육인이다. 아호는 추계(秋溪).


 

평양 출신으로 교육자 집안에서 자라나 일찍부터 신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3·1 운동에 참가했고 3·1여성동지회 초대 회장을 지낸 황애덕이 황신덕의 큰언니이다.

평양의 숭의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했다. 귀국한 뒤로는 《시대일보》, 《중외일보》, 《동아일보》 기자로 근무했다.

1927년 좌우 합작의 여성 독립 운동 세력인 근우회의 핵심부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나, 1930년대 말부터 광복 시점까지 각종 강연과 좌담회, 기고를 통하여 친일 활동을 했다. 1940년부터 박찬주의 후원으로 설립한 경성가정의숙 교장을 지내면서는 일제의 전시 체제에 적극 협력했다. 당시 부교장은 박순천이었다.

국민총력조선연맹 위원,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으로 친일 단체에도 가입했다. 조선임전보국단에는 김활란, 모윤숙, 박인덕 등이 여성 평의원으로 참가했다. 황신덕은 이들과 함께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를 결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매일신보》와 같은 친일 매체에 친일 기고문을 싣거나 좌담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광복 직후 건국부녀동맹 결성에 적극 나섰고 이후 미군정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입법의원을 지냈다. 1960년대부터는 추계학원 이사장으로서 많은 여성단체에서 활동하였으며, 3·1 여성동지회 회장도 역임했다.

[편집] 사후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도 선정되었다. 3·1 여성동지회가 주최하는 행사가 황신덕 때문에 친일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는데, 일평생 교육으로 국가에 세운 공은 덮고 강제로 했던 친일 행위를 들추어 친일파로 몰아세우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의견도 있다.[1][2]

아들 임형빈은 황신덕이 설립한 추계학원 이사장과 중앙여고 교장 등을 지냈다.

황신덕

 

 

황신덕의 친일행적
  
  <<제자를 근로정신대로 보낸 여성교육자>>
  
  <친일성향이 강했던 중앙여고 교장>
  
  일장기 머리띠를 두른 제복의 여학생이 선생님들과 함께 찍은 한 장의 기념사진, 이 사진은 1943년 한 여학생이 정신대로 차출되어 가기 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찍은 것으로 사진속의 교장은 황신덕, 부교장은 박순천이다.
  
  1970년 어느 해 황신덕 교장의 병환 소식을 듣고 찾아가 "'선생님, 그때 절 정신대로 보내신 것 너무하셨어요. 선생님 가슴 아프라고 하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때 왜 그렇게 하셨어요?' 라고 하였더니 선생님께서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도 그 일을 후회하고 있네'라고 처음으로 사과의 말씀을 하시더군요" 라고 증언하고 있다. (뉴스메이커 19992.6.5)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황신덕은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며, 탁월한 여성교육자이다.
  
  '일제하의 압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민족의 자긍을 지키며, 정부수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황신덕', '여성문제의 해결과 그 입지를 구축하는 일에 앞장서 온 황신덕은 우리민족의 수난사와 동시에 그 안에서 얼마나 꿋꿋하게 설 수 있는가에 대한 민족자존의 표상으로 현대 한국인에게 삶의 한 좌표를 제시하고 있다' 등 이것이 황신덕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이다.
  
  <각종 친일단체의 간부와 중책을 맡으며 시국강연 강사로 활약>
  
  그에 대한 이러한 공식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일제하의 그의 경력과 족적은 '일제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의 자긍을 지킨 사람'이 아니라 '친일성향이 강한 교장선생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초기에는 애국계몽적 여성운동을 이끌어 온 황신덕은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좌우세력이 협력하여 건설한 '근우회' 활동을 그만 둔 이후부터는 적극적인 친일파 여류인사 중의 한사람으로 되었다.
  
  1938년 6월 24일 종로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부인들을 대상으로 보국을 주제로 한 시국강연회를 개최하고 국방헌금을 모금하였는데, 그 자리에 연사로 참석하여 '비상시국과 가정경제'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또한 1941년 9월 16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폐품을 재생산하여 국가에 필요하게 쓰자'라는 논설은 겉으로는 절약정신을 주장하는 것이지만 결국에는 가뜩이나 굶주리고 피폐해진 민중들을 쥐어짜서 일제의 전시품을 동원하자는 것이었다.
  
  '전시생활과 부인도덕'이라는 주제의 좌담이 매일신보 1942년 1월3~10일자에 5회에 걸쳐 연제되었는데, 황신덕은 김봉희(金鳳姬), 임효정(林孝貞), 아라이(新井昌子) 등 6명과 함께 착석하였다.
  
  좌담 참석자들은 '새 시대의 도덕은 개인에서 공중도덕으로', '소극적인 것을 버리고 정에서 동의 도덕으로' 등을 논하고 있으나 중심 내용은 전시에 국가를 위하여 여성들이 적극 호응하고 나서자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매일신보 1941년 12월 25일자에는 '정전(征戰)을 뒤에서 지키는 맹서-근로의 정신'이라는 제목으로 근로정신의 신명을 갖고 책임을 다하자는 취지의 글을 실었다. 또 '어머니의 책임이 중대'라는 글에서는 "해군 지원병제도를 실시한 우리는 구군신(九軍神)과 같이 한 번 나라를 위해 죽을진대 '죽음'을 생각지 않는다는 그러한 위대함을 길러내는 어머니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라고 강변하고 있으며, '전위 여성격려대'로 청주, 충주 영동 지방을 순회하며 강연하고 다녔다.
  
  -그는 글이나 강연을 통한 활동뿐만 아니라 각종 친일단체의 간부, 임직원을 맡아 활동하였다. 황신덕은 1940년 19월에 결성된 '국민총력 조선연맹' 후생부 위원직을 맡았으며, 1941년 10월 22일에 친일세력을 총망라하여 조직된 '조선임전보국단' 에도 몇 안 되는 여성 평의원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또 1942년 1월 5일 조선임전보국단 산하기관으로 총후부인 진영을 망라한 '조선임전 보국단 부인대'가 발족되었는데 황신덕은 그 단체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징병, 학병, 해군지원병 제도가 잇따라 실시되던 1943년 무렵부터는 지원병과 학병으로 나갈 것을 강요하는 데도 앞장섰다.
  
  <근우회에서 각종 친일단체의 임원으로 활동>
  
  -황신덕은 기자로 재직하면서 애국계몽운동계열의 여성운동을 주도하였다. 1927년 여성운동과 항일운동의 일원화라는 목표 아래 여성운동계가 망라하여 근우회를 창립하였을 때 황신덕은 21명의 중앙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중책을 맡았으며, 중앙기구의 부서에서 교양교육부 상무직을 역임하였다.
  
  1928년 제1회 대회에서 지방과 해외지사의 대표가 추가되어 31명으로 중앙집행위원회가 구성될 때에도 황신덕은 다시 집행위원회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근우회가 해체되고 나서 일제의 조선인 탄압정책이 더 혹독해지고 노골화되자 친일인사로 변모하게 된다.
  
  -중앙여고의 전신인 경성가정의숙을 1940년 10월 37명의 신입생으로 시작하였다. 그런데 황신덕은 이 시절 이미 각종 친일단체에 깊이 관여하여 일제에 적극 협력하는 인사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1940년 37명으로 세운 학교는 1945년 1월에 사립학교 규정에 의해 중앙여자상과학교로 인가를 받게 된다.
  
  1983년 11월 22일 사망하기까지 황신덕은 추계학원 이사장으로 있었으며 수많은 여성단체에 관여하였고, 3.1 여성동지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인용저서>
  -친일파 99인, ②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289~294p), 저술자 : 장하진(충남대 교수, 사회학)
  -친일파 99인, ③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부록2 일제하 친일단체 및 기관소속 주요인명록 268~270p)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민족정기의 심판 : 39, 54p)
  -민족문화대백과사전 2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찬(484p)

 

 

박인덕의 이혼사연은 세간의 대대적인 관심을 끌었다.
‘신동아’ 1931년 12월호에 실린 ‘조선이 낳은 현대적 노라 박인덕’과 ‘제일선’

1932년 7월호에 실린 ‘돌아오지 아니하는 어머니 박인덕’.

박인덕(朴仁德)의 주요경력 및 친일경력
  
  -1896년 평남 용강 생
  -1916년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 동시에 이화학당 기하 체육 음악 교사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에서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학생을 선동하였다는 죄목으로 붙잡혀 4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름
  -1919년 11월 대한애국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름
  -1922년 배화여고 교사로 교육계에 복귀하면서 신문 잡지 강연을 통해 여권신장과 여성계몽운동을 위하여 활동
  -1923년 9월 감리교 여자신학교에서 금주 금연운동을 주요 활동으로 하는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를 발족하여 회장으로 활동
  -1921~26년 배화여고와 여자신학교에서 영어 음악을 가르침
  -1926년 미국 조지아주의 웨슬레안대학에 유학해 사회학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컬럼비아대학 사범대에서 교육학 문학석사를 받음
  -1928년 2월 뉴욕에서 김마리아, 황애덕(黃愛德) 등과 민족주의 단체인 근화회(槿花會)를 발기하여 활동
  -1935년 '농촌교역지침'을 발간해 농촌계몽운동
  
  -1941년 덕화여숙(德和女塾) 설립 일에 검사정 야마사와(山澤) 및 나가사키(長崎), 구라시게(倉茂) 보도부장, 이화여학교 신도순(辛島純 : 원 이름은 辛鳳祚) 등이 축사를 읽었고 교사진도 녹기연맹의 쓰다(津田節子), 청화여숙 교사가 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淸田美智子, '덕화여숙을 방문하고' 綠旗 1941.6)
  -1941년 8월 25일 부민관에서 임전대책협의회를 개최하였는데 실천위원으로 선출됨
  -1941년 8월 30일 '나서라 증산 건설(절대적인 국가 요청)'이라는 요지로 담화문 발표
  -1941년 9월 4일 부민관에서 임전대책연설회를 개최하였을 때 '승전의 길은 여기에 있다'는 연제로 강연
  -1941년 임전보국단 준비위원회 준비위원
  -1941년 9월 7일 임전대책강연회를 끝마친 임전대책협의회에서는 '이로써 실천으로!'라는 슬러건을 세우고 채권가두유격대로 나섰는데 박인덕은 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종로대에 나섰다
  -1941년 11월 15일 창립된 조선언론보국회 이사로 선출됨
  -1941년 12월 18일 동성상고에서 시국부인 대강연회가 열렸을 때 모윤숙(毛允淑)과 함께 강연
  -1941년 12월 20일 '정전(征戰)을 뒤에서 지키는 맹서'라는 요지로 매일신보에 논문 발표
  -1941년 10월 22일 부민관에서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 결전부인대회를 결성하고 오후 6시 강연회 때 사회를 맡아 '우리 1천5백만 여성은 당당한 황국여성으로서의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할 천재일우의 시기입니다' 등의 내용으로 개회사를 함
  -1942년 1월 5일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42년 2월 15일 영(英) 동양침략의 아성 싱가폴 공략 대강연회에서 '동아여명과 반도여성'이라는 연제로 강연
  -1943년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부인계몽독려반
  -1945년 6월 8일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1980년 사망
  
  박인덕의 친일 행적
  
  <<황국신민이 된 여성계몽가>>
  
  <여성계몽가로서 화려한 활동>
  
  -박인덕은 1916년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하였다. 이 시기에 이화학당 대학과는 국내 최고의 전문과정이었고 졸업생은 이화학당 내에서만이 아니라 조선사회의 주목과 기대를 한 몸에 받기 마련이었다. 박인덕은 졸업과 함께 이화학당에서 기하 체육 음악을 맡아 가르쳤다.
  
  그는 이 시기에 계몽운동적 차원에서 사회참여 활동도 하였다. 그러다가 3.1 독립만세운동 때에는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학생을 선동하였다는 죄목으로 경찰에 연행되어 4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그리고 출옥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해 11월 또한 대한애국회 사건으로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다.
  
  결혼 후 박인덕은 1923년 9월 감리교 여자신학교에서 금주 금연운동을 주요 활동으로 하는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를 발족하여 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사회활동을 계속하였다.
  1921년부터 1926년 9월까지 배화학교와 여자신학교에서 영어와 음악을 가르치다 배화학교 외국인 교사의 협조로 1926년 미국 웨슬리안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이 대학에서 사회학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컬럼비아 대학 사범대에서 교육학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미국에서도 사회활동을 계속했는데 민족주의 단체인 근화회에서 활동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근화회는 1928년 2월 뉴욕에서 김마리아, 황애덕 등 여자유학생들의 발기로 조직된 것으로 출판이나 순회강연 등을 통해 국내정세를 외국인에게 소개하여 조국광복에 기여하려는 단체였다.
  
  1931년 귀국 후 그는 교사 모임으로 조직되었던 망월구락부를 황애덕, 최활란과 더불어 '단정한 직업을 가진 여성'들의 모임인 조선직업부인협회로 개편하여 여성들을 위한 경제학 강연을 여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33년에는 농촌 부녀를 위한 이동학교를 개설하기도 했으며 감리교 농촌 부녀지도자 수양소의 일을 하기도 했다.
  
  1935년에는 '농촌교역지침'을 발간하여 종교 활동의 일환으로서 농촌계몽운동을 하였다. 그의 활동은 주로 농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행해졌으며 그들의 처지를 개선하는 것에 주요한 관심을 기울였고 무지로부터의 해방이 생활개선의 주요 수단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일제에 대한 저항보다는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합법적 공간에서 운동하는 그의 성향이 훗날 반민족행위로 나아가는데도 거리끼지 않게 만드는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녹기연맹(綠旗聯盟)의 지원을 받아 덕화여숙을 설립하여 급격한 변신>
  
  -미국에서 조선민족의 존재를 알리며 민족주의 단체에 참가했던 그가 어떤 계기로 반민족행위자가 되었는가. 이에 대한 분명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1935년경부터는 일제가 기독교에 대해서도 신사참배니 하는 각종 시책을 강요하여 강력하게 통제하였다. 이때부터 국내의 민족주의계 인물들 대부분이 이미 일제에 대해 투쟁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 되었다.
  
  -박인덕의 친일행각은 덕화여숙의 설립에서 시작된다.
  덕화여숙은 녹기연맹 부설 청화여숙을 본 따 자매학교로서 만들어졌다. 후대의 기록에 의하면 덴마크의 실업학교를 본보기로 삼은 것이라고 하나 덕화여숙은 음으로 양으로 녹기연맹의 도움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박인덕이 녹기연맹과 관련을 갖게된 것은 일본어를 배우게 되면서부터이다. 녹기연맹의 쓰에(須江愛子)에게서 배우기 시작하여 하시키타(橋北町)의 '국어강습회'를 거쳤다. 이러한 가운데 녹기연맹은 자기 끄나풀로서 박인덕을, 박인덕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줄 수 있는 학교 설립의 지원자로서 녹기연맹을 선택한 셈이다.
  
  1941년 4월 18일 덕화여숙 설립일에 검사정 야마사와 및 나가사키, 구라시게 보도부장 등이 축사를 하였고 교사진도 녹기연맹의 쓰다, 청화여숙 교사가 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황국신민의 서사'를 읊고 청화여숙과 조선신궁에 합동 참배하는 일종의 녹기연맹의 부설학교와 같은 것이었다.
  
  -1941년 8월에는 임전대책협의회의 결성에 위원 자격으로 참여했으며 9월에 김동환, 신태악, 최린 등과 함께 '임전대책협의회'에서 '승전의 길은 여기에 있다'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또한 전쟁비 조달을 위한 채권가두유격대로서 이숙종(李淑鍾), 송금선(宋今璇)과 함께 참가하였다.
  
  그가 그 당시 행하고 다닌 친일행위들은 1941년 12월 20일 매일신보에 실린 '정전(征戰)을 뒤에서 지키는 맹세'라는 글을 통해 명확히 드러난다. "대체 왜 영 미 하고 싸우게 되나를 잠깐 생각합시다...... 중대한 것 중의 하나는 남의 구역에 영 미가 침범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대동아에 사는 전 민족에게 끼치는 일이니까 우리는 정의를 위하여 굳게 싸우려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자신이 공부하고 강연하고 다녔던 미국을 적국으로 돌리고 자신의 조국을 짓밟고 있는 일본 제국주의를 비호하여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을 '정의의 전쟁'으로 미화하였다.
  그는 조선임전보국단의 평의원과 그 부인대의 지도위원으로서 1941년 12월 27일 결전부인대회에서 사회를 맡아 "지금은 우리 1500만 여성이 당당한 황국여성으로서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할 천재일우의 시기입니다. 이에 우리 반도 여성을 대표로 하여 '결전부인보국회'를 조직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전쟁이 소모전으로 되면서 군인의 충원이 급해지자 일제는 징병제를 계획하고 학병을 끌고갔다. 이를 위해서 우선적으로 선전대원으로서 각종단체를 동원하였다. 이때 박인덕은 '새 어머니 될 우리의 감격과 포부'를 논제로 한 좌담회에 참석하였고 학병을 동원하기 위해서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부인계몽독려반으로 파견되었다.
  이외에도 조선언론보국회의 이사를 맡는 등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각종 반민족단체나 각종 토론회 강연회의 연사로서 그리고 사회자로서 맹활약하였다.
  
  <해방 후 반탁 반공 연사로 활약>
  
  -해방 전에는 미국을 비난하던 입으로 박인덕은 일제가 패망하고 미군이 들어오자 돌변하여 미군정에 밀착되어 미소관계의 냉전이 시작되는 틈 속에서 다시 변신을 꾀하였다.
  1946년 신탁문제를 둘러싸고 반탁운동체가 총집결될 때 여성단체도 독립촉성애국부인회로 결집되었다. 박인덕은 독립촉성애국부인회의 전국 부인대회에서 '민주주의와 여성'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는가 하면 회의의 사회자로 맹활약을 하고 정보부장으로 선임되어 전국적 무대에 재등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군정청에 의해 제1회 국제부인대회에 남한대표로 미국에 파견되었고 미국에서 반탁여론을 조성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 미국에서 저술 강연에 열중하여 자서전적인 책 2권과 또 한권의 책을 썼다.
  그 인세와 강연료 등을 기금으로 1961년 이후 인덕실업전문대학 등을 설립하여 인덕학원 이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일제시기 학교 설립자가 되었던 대부분의 인물들이 학교를 그들의 자손에게 물려준 것처럼 그 역시 딸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인용저서>
  -친일파 99인, ②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295~302p)
  저술자 : 강정숙(영남대 강사. 여성학,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친일파 99인, ③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부록2 일제하 친일단체 및 기관소속 주요인명록 270p)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민족정기의 심판 : 33~35,39,47p, 친일파 군상 : 366, 441, 445, 447, 451, 466p)
  -친일변절자 33인, 무크 친일문제연구 제2집, 편집위원 : 김삼운 임해봉 김승태 김순석 정운현 (92~100p)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찬(59~60p)

 

 

출처 : 민족반역자처단협회
글쓴이 : ★혁명가☆ 원글보기
메모 :

▶『독립투사 유언

항일독립 투사

【독립투사 (1876-1910)

【독립투사 (1910-1945)

【독립투사 (1945-현재)】



▶◀7월의 독립운동가 "이광민" 선생 ◈만주 독립운동 통합에 앞장 선 정의부 대표◈ [5]

                   





▶◀6월의 독립운동가 ‘김익상 선생’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8]

                   





▶◀ 의병대장 "이진룡"장군 [32]

                  





▶◀ 이상화(李相和)1901. 4. 5 경북 대구~1943. 4. 25 서울. [16]

                  





▶◀ 김지섭 [金祉燮]1885(고종 22)~1928. [3]

                   





▶◀ 조경환[曺京煥][한말 의병장] 1876. 2. 14 전남 광산~1909. [6]

                   





▶◀ 지복영 ( 池復榮 ) (여성독립투사) (지청천 장군 차녀)[1919년4월11일 ~ 2007년 4월18일] [16]

                   





▶◀ 삼천만동포에 읍고(泣告)함 1948. 2. 10. [1]

                   





▶◀ 국중에 우국지사가 얼마나 있는가 -엄항섭- [2]

                   





▶◀ "최석순 "만주 무장투쟁의 선봉장 [미상 ∼ 1925. 2. 25 전사.순국]

                   





▶◀

최용신[崔容信] [1909 함남 원산~1935. 1. 23 수원]심훈의 대표작인<상록수〉

채영신의 모델 [3]

                   





▶◀ 박시창[朴始昌] [1903. 11. 5 경기 시흥~1986. 6. 7.] [1]

                  





▶◀

<font color="#000000">"건국 매국노가 매장돼 있는 국립묘지에는 가지 않겠다"

-한형석 선생</font> [6]

                  





▶◀ “화장해서 대동강 물에 뿌려달라” 김마리아 선생[1892-1944] [13] 사진첨부

                   





▶◀ [1948.4.19] "백범 김구 선생" 경교장에서 학생들에게... [15]

                   





▶◀ "왜왕은 죽었는가" 이봉창 의사 [14]

                   





▶◀ "김지섭 "일본 왕궁 '이중교 투탄의거' [1884. 7. 21~1928. 2. 20] [1]

                   





▶◀ " 남궁억 "나라를 일깨운 무궁화 할아버지 [1863. 12. 27(음)~1939. 4. 5] [2]

                  





▶◀ 어머니가 아들에게 남기는 절명서 [19]

                   





▶◀ "양기탁" 항일 언론 투쟁의 선구자[1871.4.2~1938.4.19]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