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사의 농사

2018. 1. 15. 22:30인물

 [인터뷰]수단에서 온 토마스의 꿈…“이태석 신부처럼”

15일 인제대 의대 졸업…"신뢰받는 외과의사로 살고파"
"한국서 인턴 레지던트 과정 밟은 뒤 고국 돌아가 봉사"

(부산ㆍ경남=뉴스1) 조아현 기자 | 2018-01-15 19:52 송고

 

고 이태석 신부의 추천으로 남수단 톤즈에서 한국으로 유학 온 토마스 타반 아콧씨가 15일 오후 부산 인제대학

부산캠퍼스 의과대학에서 열린 '히포크라테스 선서식 및 동창회 입회식'에 참석 전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8.1.15/뉴스1 © News1 여주연 기자



“친구이자 가족 같았던 이태석 신부, 나를 향한 믿음과 기대 있었던 것 같아…어떻게 한 사람을 이렇게까지 믿어줄 수 있나”

토마스 타반 아콧 씨(33)는 자신의 졸업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멋쩍으면서도 실없는 웃음을 연신 지었다.

故이태석 신부와의 만남을 계기로 2009년 12월 머나먼 이국땅인 한국에 발을 내디딘지 9년만에 얻은 결실이다.

토마스 씨는 故 이태석 신부를 따라 인제대학교 의예과에 진학했고 고국에서 열악한 의료환경과 내전으로 부상을 입고 처참하게 목숨을 잃어가는 사람들을 소생시키겠다는 꿈을 키웠다.

15일 오후 제34회 인제의대 의과대학에서 열린 '히포크라테스 선서식 및 동창회 입회식'에서 자신이 꿈꾸던 이상을 펼치기 위해 여린 날갯짓을 시작한 토마스 씨를 만났다.

그는 한국어로 의예과를 공부하고 졸업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자신을 한결같이 지지해준 주변의 '격려'였고 동기들 덕분이라며 겸손하게 공(功)을 돌렸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책임감도 솔직히 털어놨다.

고국 수단으로 돌아가 열악한 의료환경을 딛고 생명을 살려야 하는 자신의 사명을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있지만 역시 '부담'으로 다가오기 마련인듯 했다. 

하지만 토마스씨는 이태석 신부와 똑같은 길을 갈 수는 없겠지만 '비슷하게'라도 그의 뜻을 이어받아 자신만의 길을 가고싶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그는 뉴스1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태석 신부님과 똑같이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며 "하지만 비슷하게나마 고국으로 돌아가면 의료봉사에 힘을 쏟고 싶다"고 말했다. 

또 "똑똑하고 유능한 의사보다는 모두에게 신뢰받는 의사가 되고싶다"며 톤즈 사람들 모두에게 '친구'가 되어주었던 고 이태석 신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앞으로 인제대백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고 외과의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이번 달 의사국가고시 합격발표를 기다리고 있다.

고 이태석 신부의 추천으로 2009년 12월 한국행을 결정한 토마스 씨는 연세대 한국어학당과 중원대학교에서 2년 동안 한국어 공부에 매달린 끝에 한국어능력시험 5급을 취득했다. 이후 2012년 인재의대에 합격하고 한국에서 의사가 되기위한 노력을 거듭해왔다. 고 이태석 신부는 인제대 의예과 3회 졸업생이다.

그동안 토마스씨를 전면 지원해 온 한국수단어린이장학회는 오는 2월부터 토마스 씨가 인턴과정을 밟게될 경우 기존 입장과 변함은 없지만 지원 범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다음은 토마스 타반 아콧 씨와의 일문일답. 

―남수단 톤즈는 내전으로 고통받은 아픈 기억을 가진 곳으로 알려졌다. 지금은 어떤가?
  
▶20여년 넘게 내전이 있었다. 사람들은 전쟁을 피해 도망가다 집을 잃어야 했고 부상을 입고 진료를 받고 싶어도 병원이 너무 먼 탓에 질병에 걸려 죽는 사람도 많았다. 돈이 없거나 진료를 제때 받지 못해 죽어나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땐 어려서 뭘 할수 있었겠나(웃음). 공부를 하면서 과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면 역시 의사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5살 때 이태석 신부님을 만났고 이를 계기로 나의 꿈이 커졌다.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한국에 온지 3년이 지나고 내전을 지속했던 남수단과 북수단이 하나로 합쳐졌다. 지금은 현대식 건물이 생기고 몰라볼 정도로 발전했다.

―그래도 아직 부족한 생활기반시설이 많을 것 같은데?
  
▶그렇다. 수단에는 아직 제대로 된 병원이 없다. 수도에 가면 있지만 그곳의 병원에서도 최신식 장비 같은 건 별로 없다. 작년 2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짐작컨데 식도암인 것으로 추측된다. 갈수록 밥도 미음도 잘 삼키지 못했고 피를 토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물조차 마시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안타깝게도 수단에는 경험이 풍부한 의사도 많지 않고 의료환경도 열악하다.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어머니로부터 전해듣고 정말 많이 울었다. '내가 조금 더 일찍 졸업했더라면 아버지에게 제대로 치료를 해드리지 않았을까'하는 죄책감도 생겼다. 학업을 지원해주신 아버지에게 보답도 못해드리고 일찍 하늘나라로 보냈다. 그런 죄책감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지금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언제나 '나는 네가 해낼 줄 알았다'며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다시 힘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내 가족과 주변사람들이 어떻게 나를 이렇게까지 나를 믿어줄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한국에 의학을 배우러 오게 된 계기가 궁금한데?

▶나는 운이 좋았다. 이태석 신부님의 추천으로 오게 됐다. 2009년 크리스마스 당시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이태석 신부님과 함께 의료봉사를 하고 통역을 담당하던 한 가정의학과 의사선생님으로부터 ‘한국에 와서 공부할 생각이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알고보니 이 신부님의 추천이었다. 그때 제의를 받은 사람은 나와 내 친구 단 둘 뿐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에 대한 믿음이 크셨던 것 같다. 처음에는 영어로 학사과정을 이수한다고 듣고 한국으로 왔는데 알고보니 그게 아니었다. 모든 과정을 한국어로 공부해야 했다. 한국에서는 의학용어 특성상 한자에서 파생된 단어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모국어가 아닌 한국어, 한자, 영어 3개 국어를 배우고 외워야 했다. 때로는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기도 했다.(웃음)

―故 이태석 신부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나?
  
▶중학교 때였다. 당시 나는 이태석 신부님 옆에서 예식을 돕는 ‘복사’(服事) 활동을 했다. 신부님은 선교활동을 하면서 기타와 플룻으로 마을 사람들과 노래를 불렀고 연주그룹을 만들었는데 나와 내 친구가 초창기 멤버였다. 10명으로 시작한 그룹은 30여명으로 구성된 관악대로 커졌다. 당시 알토 색소폰을 맡아 연주하는 동안 신부님과 가깝게 지냈다. 신부님은 일주일에 한 번씩 미사를 끝내고 진료를 보셨는데 진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광경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될수 있을까’ 은연중에 생각했던 적이 있다.

―토마스씨가 본 이태석 신부는 어떤 사람인가?
  
▶8년동안 신부님과 함께 했지만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없다. 다만 분명한 건 누구에게나 기쁨을 주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톤즈에서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함께 어울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태석 신부를 만난 사람들 모두가 행복해했다. 굳이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천사’라고 할까. 처음에는 당연히 거리감이 있었지만 같이 지내면서 신부님이라는 직책은 큰 의미가 없어졌다. 나에게는 ‘친구’이자 ‘형’같은 존재였다.

―故 이태석 신부는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린다. 그만큼 존경받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 생각하나?
  
▶특히 한국에서는 의사가 되면 부와 명예를 누린다. 돈도 많이 벌고 그야말로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신부님은 그걸 버리고 수단으로 와서 남은 생애 봉사활동에 헌신했다. 보통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라도 못한다. 그러나 신부님은 끝까지 그런 삶을 선택했다. 신부님이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 깊은 마음을 나는 알지 못한다. 아마 사람들이 그걸 보고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한국어로 의예과 전공을 마친다는게 쉽지 않았을 텐데, 무사히 졸업까지 하게됐다. 소감은 어떤가?
  
▶믿기지 않는다. 한국에서 의과대학에 진학하려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다. 입학동기 가운데서도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동기들을 멀리하지 않았다. 내가 부족하고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모르는 것을 더 많이 물어보았고 도움을 청했다. 질문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창피하지 않았다. 덕분에 동기들과 엄청 친해졌고 힘도 많이 얻었다. 동기들이 모르면 교수님을 찾아갔다. 때로는 너무 자주 찾아가서 '나를 미워하지는 않을까' 고민한 적도 있었지만 한결같이 그들은 나를 적극 도왔다. 그들 덕분에 6년동안 공부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물론 유급당하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마음도 적극적인 태도를 끄집어 내는 데 한 몫했다. 공부는 내가 했지만 주변의 도움이 없었다면 졸업도, 의사국가고시 필기시험 합격도 이뤄내지 못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이었나?
  
▶가장 기억에 남는 은인이 3명이 있다. 한 명은 기숙사를 함께 사용한 룸메이트다. 굉장히 친한 친구이기도 했고 나에게 공부를 가르쳐 준 덕분에 시험성적도 매우 올랐다. 실기시험을 앞두고 동기들은 보통 함께 그룹을 만들어 연습하는데 나를 믿고 같이 손발을 맞춰준 친구도 특별하다. 아무래도 나는 외국인이고 정서가 다르다 보니 환자와 의사가 서로 신뢰감, 친밀감을 느끼는 ‘라포(rapport)’의 형성이 힘들었다. 주변 동기들과 친구들이 고맙게도 ‘형, 그렇게 하면 안되요’ 라고 가감없이 지적해주거나 피드백을 해줬다. 동기들은 내가 고쳐야할 부분을 세세하게 ‘쪽지’에 써서 전해주기도 했다. 공감 표현을 하는 방법, 환자 진단, 처방 방법 등을 엄청 자세히 가르쳐줬다. 혼자만 끙끙댔다면 절대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험이 끝나고 친구들에게 달려가 진심을 다해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니 ‘형, 원래 잘했으니까 그렇죠’ 라며 되려 격려해주더라.

―고국에서 펼치고 싶은 자신의 꿈이 있다면? 앞으로의 목표도 궁금한데.
  
▶일단 가장 큰 목표는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외과의사가 되는 것이다. 가족들에게 꿈이 현실로 된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 한국어로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고 하지 않나. 이태석 신부님과 똑같이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나의 고향에서 했던 것처럼 비슷할 정도로 의료봉사를 하고싶다. 사실 당초 졸업을 하면 곧바로 수단으로 곧바로 돌아가 병원 인턴과정을 밟으려 했다. 그런데 학장님과 주변의 만류로 계획을 변경했다. 수단은 아직 의료수준이 한국보다 낮기 때문에 인제대학교 백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까지 마쳤으면 하는 교수님들의 바람이 컸다. 처음에는 내과를 전공하려 했다가 주변의 조언을 통해 외과의사가 되기로 결정했다. 후회는 없다. 조언을 받아들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수단에서도 외과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똑똑하고 유능한 의사보다는 사람들에게 신뢰받는 의사가 되고싶다.

―故이태석 신부의 뒤를 이어 같은 길을 걸어가겠다고 했다. 자신에게는 어떤 스승이었나?
  
▶살면서 누군가를 롤모델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이태석 신부님을 만나 곁에서 지내는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단순히 교실에 앉아서 수업을 통한 주입식 교육을 통해서는 사제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태석 신부님이 직접적으로 ‘이렇게 하라’고 나에게 가르쳐준 건 없다. 다만 뒤에서 지켜보면서 ‘겸손한 자세’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기쁨’ ‘서로 믿고 지켜주는 신뢰관계’ ‘어느 누구라도 친구처럼 대하는 친근함’…이런 인생의 소중한 규범들을 배웠다. 이태석 신부가 돌아가셨을 때 친자식, 가족을 잃은 것처럼 가장 슬퍼했던 이들이 톤즈 사람들이다. 먼저 다가가는 자세를 배운 덕에 한국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
  
▶도와준 사람들을 나열한다면 너무 길어진다. 그동안 저를 믿고 ‘할 수 있다’고 격려해 준 분들께 특히 감사를 표한다. 크게 느낀 건 아무리 힘들더라도 ‘괜찮아’ ‘넌 할수 있어’ ‘도와줄게’ 라는 말 한마디면 사람은 힘이 난다. 무엇보다 주변의 격려가 의과대학을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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