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곡을 찌르는 칼럼

2014. 6. 28. 09:21시사

도대체 무슨 염치로

칼럼으로 한국 읽기 (29)

 

김명수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후보를 둘러싼 의혹은 제자 논문 표절 및 연구비 가로채기부터 사교육체 주식 보유, 경력 부풀리기, 불법 정치 후원금까지 다양하다. 김 후보가 27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국립국제교육원으로 인사청문회 준비를 위해 출근하고 있다.

 

연합뉴스

 

누가 누굴 개조한다는 건가. 도대체 무슨 염치로. 몰염치가 수권(受權) 자격인가. 각료 후보들 면면이 가관이다. 부도덕한 짓만 솔선한 자들이다. 정말 부끄러움을 모르는 정권이다.

“소크라테스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을 통치자의 첫째가는 품성으로 제시한다. 권력을 이용해 사욕을 채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름을 떨치고자 하는 욕망조차 부끄러움으로 여긴다. 자기에 대한 한량없는 관용과 사랑으로 무장한 기괴한 나르시시스트들, 얼굴이 두꺼운 것을 천부의 능력으로 아는 철면피들이 나랏일 한다고 나대는 오늘 이 ‘파렴치 공화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미덕이다. 조선총독부가 파견한 듯 식민지 노예의식을 퍼뜨리던 사람이 둘도 없는 애국자 행세를 하고, 학생들이 따라 배워선 안 될 짓만 하는 반교육 학자가 교육부 수장이 되겠다고 한다. 책임진다더니 주군 말 한마디에 주저앉아 ‘국가개조’ 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 진실한 사람들은 좀처럼 나서려 하지 않고 낯 두꺼운 자들이 활보하는 곳이 현실 정치다. 그렇다고 해서 손 놓고 돌아서 버리면 정치판은 누가 더 뻔뻔한지 겨루는 경기장과 다를 바 없게 되고, 국민은 평균치의 도덕역량에도 미달하는 자들의 지배를 받는 처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파렴치들의 나라(한겨레 ‘아침 햇발’ㆍ고명섭 논설위원) ☞ 전문 보기

 

“다시는 세월호 같은 사건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며 대통령은 국가개조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개각을 한다고 했다. (…) 그렇게 해서 신설되는 교육 사회 문화를 총괄할 부총리 겸직인 김명수 교육부 장관 후보는 제자의 논문을 표절한 것만 8편. 그 중 다섯 편은 연구비까지 빼돌렸다. (…) 제자들 연구비까지 빼앗아 써도 돈이 모자랐다는 그가 재직한 대학의 평균연봉이 작년에 9,327만원이었다. 이병기 국정원장 후보자는 알다시피 한나라당 시절 그 유명한 차떼기 사건의 돈 심부름꾼이었다. (…) 최양희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는 부부가 21개월 사이에 갑자기 21억원의 출처불명 저축이 늘어났다. (…) 정성근 문화체육부 장관 후보는 밝혀진 음주운전만 두 번이다. (…) 이런 명단을 장관감이라 내놓은 정부는 사전 인사점검을 제대로 하겠다며 인사수석을 신설하겠단다. 세월호 참사가 나자 국가안전처 신설에 부총리 증설을 내세우더니 잘못만 하면 벼슬아치가 늘어나는 염치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장관감 하나 멀쩡한 사람을 못 내놓는 그들이 인사수석감은 제대로 내놓을 수 있을까. 나는 바담풍 해도 너는 바람풍해라? 국가개조는커녕 있는 국가 이끌어갈 자격은 있는가.”

 

-나는 ‘바담 풍’(한국일보 기명 칼럼ㆍ서화숙 선임기자) ☞ 전문 보기

 

말은 맞다. 언론이 진영 논리에 기울어 진실에 눈감아선 안 된다. 그러나 KBS의 문창극 보도가 진짜 그랬냐는 아직 논쟁의 영역이다. 문제는 맥락이다. 아전인수는 피장파장 아닌가.

 

“잘못된 보도가 여론을 이끌어도 바로잡을 수 없는 사회라면 건강하지 않다. 천박한 선동이 공론을 대신하고, 국가 대사를 좌지우지하는 건 더욱 위험하다. 처음 보도한 KBS는 잘못이 없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아무리 강연 내용을 따왔어도 전달하는 의미가 달라졌다면 잘못된 보도다. (…) 의도했건 아니건 사실과 다르게 보도했다면 바로잡는 것이 용기다. 문제는 의도된, 혹은 오독(誤讀)에 의한 잘못된 편집뿐 아니다. 대부분 직접 들어보고 이해하려는 노력 대신 다른 매체의 보도를 인용하기 급급했다. 사실 확인 노력을 포기한 SNS가 여론 행세를 하는 것도 문제다. 심지어 SNS 인용 횟수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이용하고, 정책 결정자들이 따라야 할 기준인 것처럼 주장하는 매체도 여럿이다. 이성적인 판단을 막는 또 하나의 장벽은 진영논리다. 보수건 진보건 마찬가지다. 대결이 벌어지면 이성을 잃어버린다. 광우병 파동이나 노무현 대통령의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 논란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오보는 바로잡는 게 용기다(중앙일보 기명 칼럼ㆍ김진국 대기자) ☞ 전문 보기

 

“독자께서 연회비 50만원을 내고 테니스 클럽에 가입했다고 가정하자. 연습장에 1개월 다녔는데 무릎 관절을 다쳤다. 불행히도 지금 그만둬도 회비는 반환 받을 수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50만원이 아까워서 아프더라도 참고 다니는 게 좋을까. (…) 요컨대 ‘본전생각’ 에 따른 무리한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얘기다. (…) 심리학을 경제학에 접목시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 프린스턴대 대니얼 카너먼 명예교수는 투자실패의 대표 원인으로 매몰비용 효과를 들었다. (…) 정쟁을 일삼는 정치권과 이를 부채질 하는 일부 언론의 행태도 본전생각과 무관하지 않다. 지금 야당은 그들이 여당이던 김대중ㆍ노무현 정부 때 당시 야당에게 당했던 분풀이를 그대로 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명한 장관 후보자에 대한 ‘학자로서 양심도, 장관 자격도 없는 부도덕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는 비난은 노무현 정부 시절 한나라당이 퍼붓던 말이다. 마찬가지로 ‘거대 야당이 국정 발목을 잡고, 총리 후보자의 국정 수행능력 검증은 외면한 채 도덕적 흠을 찾는 데만 매달린다’는 새누리당의 정부 옹호적 태도는 김대중 정부 시절 집권당의 논평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문창극 전 국무총리 후보자의 낙마 과정에서 전개된 언론의 난타전도 마찬가지다. 문 후보자가 일부 언론으로부터 부당한 공격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 언론 매체는 참여정부 시절 전체 맥락과 상관없이 일부 발언만 툭 떼어내 노 전 대통령을 공격한 대표 주자다. 이번에는 KBS가 일부 편집된 장면을 내보냈지만, 2004년에는 MBC가 보수단체 집회 장면 중 선동적 부문만 골라내 방송했었다.”

 

-이제는 버려야 할 ‘본전(本錢) 생각’(한국일보 ‘36.5°’ㆍ조철환 국제부 차장) ☞ 전문 보기

 

세월호가 가라앉은 지금, 우리가 돌아볼 건 지난 세월. 특히 외눈박이 성장주의. 부도덕은 이제 용인 대상이 아니다. 선의(善意)도 세심해야 한다. 때로 무신경은 무관심보다 못하다.

 

“나는 이 골육상쟁의 이념전쟁론에 민족적 심성의 변화 두 가지를 보태고 싶다. 하나는 극도의 고통과 빈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어떤 행위도 정당화되었다는 점이다. (…) 여기에 박차를 가한 것이 ‘변화에 대한 인식 변화’이다. (…) 6ㆍ25와 그 혼돈의 전후를 넘은 후, 4ㆍ19의 밑으로부터의 혁명, 5ㆍ16의 개발 계획에서 시작된 변화들은 현실을 개선하는 적극적 성과를 보이며 전날의 비관적인 선입관을 벗겨내고 우리 운명을 발전시킬 낙관적이고 도전적인 자신감으로 반전되었다. (…) 그 ‘생존 방법의 정당화’와 ‘변화의 추구’ 덕분에, 우리는 6·25란 ‘그라운드 제로’에 던져진 최악의 상태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 그럼에도, 영광과 자신감의 뒤편에는 당연히 그늘과 회의가 스밀 수밖에 없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관대한 ‘정당화’는 부도덕도 용인했고 ‘변화의 추구’는 이른바 ‘새것 콤플렉스’로 왜곡되었다. 우리의 ‘압축 성장’은 이 성급한 성장주의의 박력 속에 매우 불편한 진실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절대빈곤보다 더 문제적인 ‘상대적 빈곤감’의 확대, 창의와 근검의 미덕에서보다 부패와 비리의 유착으로 가능해진 부의 축적, 문어발 경영으로 추태를 보이는 재벌 기업들의 탐욕, 크고 작은 거래에서의 ‘갑’의 횡포 등 갖가지 악덕들을 모은 천민자본주의의 횡포가 오늘의 한국적 발전에 동력이 되었다는 혐의를 지우기 어렵다. (…) 이제 우리는 그 성급한 산업화, 비약적 성장과 함께 우리의 영혼도 따라오고 있는지, 거기에 어울릴 정신과 양식이 어깨를 겯고 있는지, 늦었지만 돌아볼 때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맨 모습인 ‘세월호’ 밑창에 평형수를 제대로 채우고 있는지 지켜봐야 한다.”

 

-6ㆍ25에서 60년, 뒤돌아봐야 할 ‘세월(호)’(한겨레 ‘특별기고’ㆍ김병익 문학평론가) ☞ 전문 보기

 

“컴컴한 바닷속 세월호의 연속. 이 시간을 버티고 있는 이들에게 ‘잊지 말자’는 말은 이상하다. 삶이 ‘세월호’인데, 세월호를 기억하자는 다짐이 필요한가. 잊을 수 없는 이들을 잃었는데 누구를 잊지 말자는 것인가. (…) ‘잊지 말자’는 잊을 수 있는 사람과 절대로 그럴 수 없는 사람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사실 지금 세월호 유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잊지 말자’가 아니라 오히려 ‘잊어야지, 살아야지’라는 눈물 속의 다짐일 것이다. 고통받는 사람과 위로하는 사람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 다름을 인정할 때 ‘진정한’ 위로가 가능하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기억은 시혜가 아니다. 누구나 당사자가 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면, ‘잊지 말자’는 말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잊지 말자?(경향신문 ‘정희진의 낯선사이’ㆍ여성학 강사) ☞ 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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