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준하는 누구인가" . 유족은 김재규가 도와줬다.

2014. 1. 24. 19:28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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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김대중과박정희를 합쳐 놓는다 해도 그만 못하다. -황골산- 



오호 장준하 선생!

여기 이 말 없는 골짝은 빼앗긴 민주주의 쟁취, 고루 잘 사는 사회, 민족의 자주평화, 통일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장준하 선생이 원통히 숨진 곳. 뜻을 같이하는 젊은이들이 맨손으로 돌을 파 비를 세우니, 비록 말 못하는 돌부리 풀뿌리여! 먼 훗날 반드시 돌베개의 뜻을 옳게 증언하리라.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가, 종교인, 언론인, 사회운동가였던 장준하(張俊河, 1918년 8월 27일 ~ 1975년 8월 17일) 선생의 추모비 비문 내용이다.

"우리가 맞잡은 손 잊지 말자. 우리 가슴속 열기 기억하자.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
2012년 8월 17일 오전 10시40분께 북녘 땅이 손에 잡힐 듯한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통일동산에서 파주시립합창단이 부르는 뮤지컬 <청년 장준하>의 삽입곡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가 숙연하게 울려 퍼졌다. "못난 조상이 되지 말자!"란 말은 장준하가 일본군을 탈출해 중국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 6,000리 대장정을 하면서 버팀목으로 삼았던 신념이자 경구였다.

 

▲ 지난 12월 5일 경기 파주시 탄현면 장준하공원에서 장준하 선생 사인규명을 위한

개묘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 News1 송원영 기자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월간 <사상계>를 창간한 언론인,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선 민주투사였던 장준하(1918~75) 선생을 기리는 ‘장준하 공원’이 그가 영면한 지 37년 만에 파주 통일동산에 문을 열었다. 그러나 장준하 선생의 유골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장준하 선생 의문사 진상조사 공동위원회(공동위)가 고(故) 장준하 선생의 타살 의혹을 밝히기 위한 개묘 작업을 2012년 12월 5일에 진행한 것이다.

 

이에 앞서 광복 67주년을 맞이한 2012년 8월 14일, 국가가 추락사로 공인한 장준하 선생의 사망 원인 기록은 반론이 불가능할 정도의 도전에 부닥쳤다. 장준하의 유족과 ‘장준하 추모공원추진위원회’ 관계자들이 충격적인 사실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8월 1일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나사렛천주교 공동묘지에 묻힌 유골을 파주시 탄현면 통일동산에 조성된 ‘장준하 공원’으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의사가 검시한 결과, 머리 뒤쪽에 지름 6cm 정도의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
8월 16일, 장준하기념사업회는 유골 사진과 검시를 맡은 서울대 의대 법의학연구소 교수 이윤성의 소견서(‘뒷머리 함몰 의한 사망’)를 공개했다.

 

▲장준하 유골. ⓒ장준하기념사업회

 

 

1975년 들어 장준하는 재야와 야당 전체를 아우르고 군부 일부가 동조하는 어떤 거사를 계획 중이었으며, 여러 가지 증언으로 미루어 모종의 거사는 8월 20일경으로 예정되었던 것이 확실해 보인다.

 

또한, 장준하는 국회의원 재직 시절에 사적인 인연이 있던 김재규와 만났는데, 당시 2군단장이던 김재규는 장준하의 의정 활동과 청렴함에 감동하여 장준하의 죽음 이후 박선호를 시켜 가족들을 돌봐주었다고 한다.

 

1976년 말, 김재규는 장호권을 남산으로 불러 “부친의 사망사건은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말해주고, 10·26 3개월 전에는 미국에 나가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미국행을 권유했다. 장호권은 장준하의 계획에 포함되었던 군내 동조 세력이 김재규 등이며, 10·26도 장준하의 영향을 입은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는 측근 임춘원을 집으로 초대해 아침 식사를 함께했다.
임춘원의 증언에 의하면 장준하는 천주교에 입교하였다는 말과 임시정부 태극기 등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했다는 말을 하였고, 며칠 전 망우리에 있는 부모의 산소에 다녀왔다며 벌초로 갈라진 자신의 손바닥을 펴보이며 보여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벌초로 생긴 이 손바닥의 상처는 나중에 경찰에 의해 장준하가 산에서 추락하는 도중 소나무 가지를 붙잡아 생긴 것이라며 그의 추락사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왜곡되어 발표되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장준하는 호림산악회 회원 약 40여 명과 함께 경기도 포천 이동면의 약사계곡 입구에 도착하여 약사봉에 올랐다. 그리고 이날 오후 약사봉에서 약사계곡 방향으로 뻗은 절벽 아래에서 김용환 및 호림산악회 회원들에 의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날 형식적인 사고 조사와 시신 수습이 이뤄진 이후, 시신은 유족들에게 인계되었다.

유족에 의해 운구된 시신은 8월 18일 오전에 상봉동 자택 안방에 마련된 빈소에 안치되었으며, 8월 21일 오전 8시에 자택에서 가족 발인예배를 마치고 영구차로 명동성당으로 옮겨져 오전 10시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하는 영결미사가 엄수되었으며, 시청 앞, 국회의사당, 중앙청을 거쳐 서대문형무소 앞을 지나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의 나사렛 묘지에 옮겨져 안장되었다.

▲ 장준하 전집 1, 돌베개

 

 

장준하 선생의 자서전 제목은 <돌베개>이다. 1918년 8월 27일 평북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에서 장로교 목사이던 장석인(張錫仁)과 김경문(金京文) 의 4남 1녀 중 첫째 아들로 태어난 그의 배경으로 보아 돌베개는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야곱의 돌베개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는 개신교 목사가 될 계획이었다고 한다.
창세기에서 ‘하란’으로 도망하던 초라한 도망자 야곱은 밤이 되자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돌을 하나 가져와 베개를 삼았다. 여기에서 야곱의 돌베개는 고난의 상징이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축복의 증거로 삼으셨으며, 야곱의 돌베개는 하나님 집의 주춧돌이 된다.

 

그는 자서전 <돌베게>를 통해 "우리 집안의 불행을 내 한 몸으로 대신하고자 이른바 그 지원에 나를 맡겨 버렸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그의 부친은 일본의 신사참배를 거부한 개신교 목사로 왜정의 요시찰 인물이었다.

학병을 피하면 일제가 가족에 가할 탄압 때문에 학병에 지원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1월 20일 중국 주둔 일본군 제65사단 7991부대에 배속된 그는 같은 해 7월 7일 중국 장쑤성(江蘇省) 쉬저우(徐州)에서 탈영해 민간인 복장을 갖추고 충칭까지 향했다. 이때 하늘의 별을 보고 성경에 나오는 돌베개를 생각하며, 나라를 잃은 부끄러운 선조의 모습을 보고 반성하며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조가 되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이런 야곱의 ‘돌베개’와 함께 일평생을 보낸 장준하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험난한 고난의 행군을 했을까? ‘돌베개’가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마도 스스로 부여한 신념이 이끄는 데로 산 그의 인생 역정을 한마디로 설명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신념이 있고, 그 신념이 옳았다는 것을 계속 증명하면서, 대의의 길을 가는 여정을 그는 아직도 멈추지 않은 것이다.

 

장준하는 누구인가 - 전자책 표지
실로 모골이 송연할 정도의 유골로 세상에 나와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고 있는 시점에 장준하 선생의 일대기를 전자책으로나마 발간하게 된 것은 그래서 더욱 뜻깊은 일이다.
이 책은 저자 김종철이 2012년 8월 27일부터 2012년 11월 19일까지 「프레스바이플」에 연재한 것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2012년 8월 14일 발표된 장준하 선생의 유골 공개에 충격을 받고 집필을 시작해 3개월에 걸쳐 취재한 끝에 써낸 장준하 선생의 일대기라고도 할 수 있다.
저자 김종철은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일념으로 써내려갔다고 한다.

 

저자: 김종철 (언론인, 프레스바이플 회장)
1944년 충남 연기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67년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했으나 1975년 자유언론실천운동 주동자라는 이유로 강제 해직된 뒤 문학평론과 번역을 겸했다. 1984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 공동대표를 맡았고, 1985년부터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의 대변인과 사무처장을 지냈다.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에 참여해서 논설간사와 편집부위원장, 논설위원으로 일했다. 그 후 연합통신(연합뉴스로 개명) 대표이사, 사단법인 한국-베트남 함께 가는 모임 이사장, 민주개혁국민연합 공동대표, 아태민주지도자회의 이사, 국제언론인협의회 이사, 한국신문협회 감사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재능대학교 초빙교수로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한편 시민단체인 민주통합시민행동 공동대표, 인터넷신문 “프레스바이플” 회장을 맡고 있다.

 

평론으로 <작가의 진실성과 문학적 감동―이문구론>, <저항과 인간해방의 리얼리즘―김정한론> 및 <상업주의소설론> 등이 있고, 주요 저서로는 <저 가면 속에는 어떤 얼굴이 숨어 있을까>(1992),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1995), <마침내 하나됨을 위하여>(1999), <지역감정 연구>(공저, 1991) <세시봉 이야기>(2011), <당신의 종교는 옳은가>(2011), <교육인가 사육인가>(2011), <글쓰기가 삶을 바꾼다>(2011), <음악, 삶의 소리를 듣다>(2011), <영화, 삶의 풍경을 찍다>(2011), <박근혜 바로보기>(2012) 등이 있고, 주요 역서로 <말콤 엑스>(공동번역, 1978), <프랑스혁명사>(1982), <인도의 발견>(1981), <마호멧>(1983), <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2005) 등이 있다.

 

목차
'뼛속까지 항일' 집안의 젊은 신학도
갑작스런 결혼과 일본군 '자원입대'
치밀한 작전으로 일본군을 탈출하다
평생동지 김준엽을 만나다
유격대 거쳐 광복군 훈련반으로
내의 잘라 표지 만든 '등불' 창간
파촉령을 넘어 임시정부로
김구와 임정 각료들을 만나다
임시정부 안의 파벌 다툼
임시정부 떠나 무장투쟁의 길로
벼르고 벼르던 국내 잠입이었건만
돌아온 임시정부를 냉대한 미군
해방공간에서 백범의 비서로
경교장 떠나 족청의 이범석 곁으로
피난수도 부산에서 <사상계> 창간
사상계 창간호 매진과 '등짐꾼 발행인'
지성인이 되려면 사상계를 읽어라
사상계, 함석헌을 영입하다
함석헌의 '민중'과 '씨알''
이승만에 정면 도전한 사상계
장면 정부의 국토건설본부를 이끌다
5·16 쿠데타를 지지한 사상계
'5·16을 어떻게 볼까'와 사상계의 수난
'부패언론인'으로 몰리다
군정연장 반대투쟁을 선도한 사상계
사상계 '매국외교' 반대 전략본부로
세무사찰로 폐간 직전에 이른 사상계
박정희는 '밀수왕초', '남로당 조직책'
'옥중 출마'로 국회의원 당선되다
'장준하의 사상계' 숨을 거두다
3선 개헌 반대투쟁 선봉에 서다
정치활동과 함께 '씨알의 소리' 편집
정치권 떠나 재야 '반유신 투쟁' 대열로
박정희 겨눈 '재야대통령'의 사생결단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반공·승공주의에서 통일지상주의로
인혁당 '사법살인'과 김상진 할복 자결
약사봉의 의문사, 죽음인가 죽임인가
'장준하 타살 확실'은 가설이 아니다
따뜻한 마음과 불굴의 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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