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 24. 14:58ㆍ진실
"71년 지났지만 죽은 내 아기들을 어찌잊나" 이하늬 기자 입력 2019.03.24. 09:08 수정 2019.03.24. 09:27 송순희 할머니(95)가 지난 3월 14일 인천 자택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송순희 할머니(95)는 제주도에서 나고 자랐다. 한국전쟁 이후 인천에 정착했고 지금도 인천에서 산다. 나이 때문인지 안 아픈 곳이 없지만 그래도 건강한 편이다.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없다. 10년 전부터는 주말이면 꼬박꼬박 성당을 찾는다. 뒤늦게 세례도 받았다.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과 금실은 좋았다. 12살 연상인 남편은 송 할머니에게 평생 극진했다. 벌이도 나쁘지 않아 경제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었다. 누가 봐도 ‘평범한 삶’이었다. 하지만 딸은 “엄마가 웃는 걸 잘 보지 못했다”며 “항상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때로는 그런 엄마가 답답하기도 했다. 자식들이 엄마가 제주 4·3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10여년 전이다. 자신이 겪은 아픔을 60년 세월 동안 가슴에 묻어놓았다. 남편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남편은 눈치로 조금씩 알게 됐다고 했다. 송 할머니는 첫 결혼에서 얻은 아이 셋을 4·3을 겪으면서 모두 잃었다. 1년간 육지 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제주를 떠나면서 묻은 일이다. 그날 마을 전체가 불탔다 1948년 10월 출장 다녀온다던 남편은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서북청년단이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인다는 소문이 한창일 때였다. 세 살배기 아이는 등에 업고, 네 살된 아이 손을 잡고 남편을 찾아나섰다. 막내는 뱃속에 있었다.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녀도 남편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군인들이 곧 마을에 불을 지른다는 소문만 돌았다. 시어머니는 송 할머니 손을 잡고 울면서 “너랑 나랑 아이 하나씩 데리고 숨자. 내가 그릇 같은 거 땅에 묻어놨으니까 죽지 않으면 그거 파서 쓰고 살아라”고 말했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시냇가 옆 동굴에 몸을 숨겼다. 그 날 마을 전체가 불탔다. 낮에는 경찰과 군인 눈을 피해 숨어다니고 밤이면 불탄 집터로 돌아와 잠을 잤다. 그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 날 총소리가 ‘와지기땅 와지기땅’ 해. 사람을 죽이면서 오는 소리였어. 아기를 업고 울면서 막 뛰었어. 시냇가 굴에 숨고 앉았더니 ‘이 개 같은 X 나오라’ 그래.” 고개를 들자 칼을 꽂은 총부리가 눈앞에 있었다. “살려달라고 하니까, 신랑을 내놓으라는 거야. 빨갱이 지집 너 신랑 내놓으래. 신랑이 면사무소에 다니고 이름난 사람이니까, 동네 사람들은 다 알거든. 그 사람 이름이 ○○인데 날 보고 ○○이 지집년이래.” 옆에서는 젊은 남성들이 죽창으로 다른 여자를 찌르고 있었다. 피가 솟구쳤다. 여자가 쓰러지자 경찰은 총으로 여자를 쐈다. 경찰과 군인, 그리고 서북청년단으로 보이는 젊은 남성들은 잡힌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죽창과 칼로 마구 찔렀다. 옷이 찢어지고 죽창이 살을 파고들었다. 업고 있던 아이의 다리도 칼에 찔렸다. 송 할머니와 시어머니의 옷은 모두 찢겨 알몸이 훤히 보였다. 시어머니가 속옷을 벗어 송 할머니에게 입혔다. 한쪽에서는 총소리에 이어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만 해도 그 이상의 공포는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진짜 공포는 서귀포경찰서로 끌려간 뒤 시작됐다. “이 빨갱이 지집X, 폭도한테 쌀 몇 가마 (산에) 올렸어?”라는 질문이 반복됐다. “배급 타 먹는 사람이 쌀을 어떵(어떻게) 올릴 수 있수꽈?”라고 답하면 몽둥이가 날아왔다. “어깨에 피가 줄줄하지. 온몸이 전부 검은 거야. 멍으로.” 그때 맞은 어깨는 평생 할머니를 괴롭혔다. “50가마 올렸수다. 50가마 올렸수다.” 아무렇게나 답했다. 경찰은 송 할머니를 끌고가 유치장에 넣었다. 밥 때가 되면 보리와 콩을 섞은 주먹밥이 툭툭 던져졌다. 그걸 못받으면 굶었다. 하지만 굶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름이 불린 사람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한 유치장 안에서 가족의 이름이 불려도 소리내 울 수 없었다. 제주도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을 찾은 시민들이 각명비 앞에서 추모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감옥에서 죽은 둘째, 감옥에서 태어난 셋째 송 할머니는 1년형을 받았다. 죄명은 알려주지 않았다. “난 재수 있으니까 1년을 받은 거야. 재수없는 할망들은 무기 받았지. 지금도 생각나. 50이 넘는 제주시 여자가 무기를 받았는데 ‘아이고 내가 무슨 죄가 있나. 동네 사람하고 개인감정이 있으니까 나를 빨갱이로 몰아가지고 이렇게 됐다’ 이래요.” 그렇게 허술한 ‘재판’이었다. 육지로 가는 배에 올랐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물어볼 엄두도 못냈다. 옆에 있던 여자가 갑자기 “내 아기가 죽었다”고 울면서 말했다. 한겨울, 엄마가 며칠을 굶어 젖이 나오지 않아 굶어죽은 것이었다. “그 여자, 아이를 묻어주지도 못하고 형무소로 끌려갔어.” 도착한 곳은 전주형무소였다. 칼에 다리를 찔린 아이가 시름시름 앓았다. 살이 썩어 뼈가 보였다. “형무소 간수가 그걸 보고 울어요. 독방으로 들어가 있으라고 하더니 아이 먹을 거 들여 주더라고요. 아기가 그걸 먹어보기나 했으면 내 가슴이 덜 찢어졌을까. 안고 있다가 깜빡 봤더니 목숨이 떨어진 거야.” 송 할머니는 얼마 뒤 안동형무소로 이감됐다. 전주형무소가 ‘미어 터진다’는 이유였다. “안동형무소는 방도 넓고 화장실도 따로 있고 지내기는 전보다 편하고 좋았는데 난 너무 힘들더라고. 귀찮고 살맛이 안 나요. 시어머니가 데려간 큰아이는 어찌 됐을까. 죽은 아이 불쌍해서 어쩌나.” 그리고 그해 여름 셋째 아이가 형무소에서 태어났다. 감형이 됐는지 10개월 후에 석방됐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살아있는 게 아무 소용없이 느껴지는 거라. 아이도 죽고 남편도 죽었을 것이고 마을이 다 불타버렸는데 어디 가서 무얼 하며 살까. 그래도 가족이라도 만나보고 싶어서 꾸역꾸역 고향에 가본 거지.”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시댁 식구는 몰살당했고 남편 행방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친정 사정도 비슷했다. 5남매 중 2명이 사망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남동생이 마산형무소에 수감됐었나봐요. 마산형무소에서 병이 나서 사람이 다 죽게 됐으니까 데려가라고 연락이 왔다는데 데리러 갈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다 죽고 사람이 어디 있어. 동생은 거기서 죽어가지고 시체도 못찾았어요.”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신고만 1만5000건에 이른다. 일가족이 몰살당했거나 육지나 일본으로 도피한 사례, 살아남았어도 신고도 하지 못한 사람이 허다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희생자 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각에서는 제주도민 8분의 1(3만명에서 최대 8만명) 이상이 죽거나 행방불명된 것으로 보고 있다. 갈 곳이 없어 친척집에 신세를 졌다. 그리고 얼마 안가 형무소에서 낳은 아이가 경기를 일으키더니 깨어나지 못했다. 아이가 죽은 다음날은 눈이 많이 왔다. 걸을 때마다 눈에 발이 푹푹 빠졌다. 4·3 당시 아이들이 어찌나 많이 죽었던지 아이들만 따로 묻는 곳이 있었다. “내 품에서 아이 둘을 보낸 거야. 셋째는 내가 안고 가서 묻었지.” 송 할머니(왼쪽에서 두 번째)가 30대 시절 찍은 사진. 딸은 “엄마는 웃는 사진이 없다”고 말했다. / 우철훈 선임기자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돌아오고… “시가 친척이 하는 이야기가 ‘조카, 여기 있으면 못살아. 시집가서 다른 데 가서 살아. 시집가지 않으면 죽어’ 그래.” 남편을 기다리고 싶었지만 살아야 했다. 서둘러 재혼을 했다. 제주 사람인 남편은 인천에서 큰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뒤 첫째 남편이 살아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산형무소에 수감돼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재가한 지 오래되지 않았고 때가 이런 때라 아무 관계없으니 나오라’고 해요. 먼저 신랑한테 재가했었다고 말 안할테니까 마산으로 면회가라고. 아이가 들어섰는데 어떻게 해. 임신했다고 말도 못하고. ‘아이고 난 마산 못가요’ 해놓고는 친정에 가서 엄마 붙들고 막 울었어요.” 인천에 자리잡고 살면서 제주에서의 일은 모두 잊고 싶었다. 재혼한 지 8년 만에 제주도를 찾았다. 막내동생의 결혼 때문이었다. 결혼식에서 첫째 남편을 만났다. “스물네 살에 헤어졌는데 서른여섯에 만난 거야. 서로 멍하니 보고만 있었어. 그냥 한이 맺혀서….” 몇 년 뒤 첫째 남편이 술병으로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만 들었다. 송 할머니는 60년 동안 이런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품에서 자식들이 죽고,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은 살아 돌아오고. 속옷을 벗어줬던 시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자신의 인생이 왜 그렇게 됐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시국 때문에 팔자가 망했다”는 말로 정리했다. 10년 전, 제주 4·3도민연대가 할머니를 찾아오고 나서야 그동안 말 못했던 이야기를 풀어놨다. 송 할머니 이야기는 가족들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간 인터뷰에 잘 응하지 않았다. 인터뷰를 하더라도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인터뷰를 하는 게 맞는 건지, 혹시나 불이익을 받는 게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다. 지난 1월, 수형인 18명이 70년 만에 무죄를 받았다. 송 할머니는 재심 청구 소식을 듣지 못해 함께하지 못했다. 그는 남은 생존자들과 함께 재심을 청구하려고 준비 중이다. 그는 “이제 와서 사과를 받아 무어해”라고 하면서도 “이제 죽을 때가 되니까 그때 고비고비 어떻게 맞은 거, 내 아기 죽은 거, 그런 생각만 나더라고.” 할머니는 여전히 1948년에 머물러 있다. ‘4·3도민연대’는 2013년부터 수형인에 대한 실태조사를 하고 있다. / 이하늬 기자 제주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제주 4·3 수형인 피해자들이 재심을 청구하고 무죄를 받기까지는 ‘4·3도민연대’(도민연대)의 역할이 컸다. 도민연대는 재심보다는 국가배상소송을 우선하자는 변호인단에 ‘무조건 재심’을 주장했다. 법적으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더 늦기 전에 시도라도 해봐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김영란 도민연대 조사연구원은 “어쩌면 단순, 순진했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도민연대의 공식 명칭은 ‘제주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다. 1999년 이전까지 4·3과 관련된 활동은 위령사업과 학술연구, 문화·예술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제주도 내에서 다른 차원의 ‘운동’을 하자는 목소리가 모여졌다. 1999년 3월 8일 특별법 제정을 위한 ‘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도민연대가 꾸려졌다. 도민연대는 거리투쟁과 상경투쟁 등을 펼쳤다. 특별법은 2000년 1월 제정됐다. 1999년에는 ‘수형인 명부’가 세상에 알려졌다. 추미애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국가기록원에서 찾아냈다. 많은 이들이 특별법이 제정됐으니 당시 무작위로 잡혀간 수형인들에 대한 진상규명도 이뤄질 거라고 생각했다. 2003년 진상보고서가 나왔지만 수형인에 대한 언급은 없다시피 했다. 수형인들은 2007년 특별법이 개정되면서 4·3 피해자로 신청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불법체포와 구금에 대한 진상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도민연대는 전국을 다니며 ‘4·3 형무소 순례사업’을 하고 있었다. 순례 도중 수형인이었던 생존자를 만나기도 했다. 이후에는 생존자와 함께 순례를 하며 증언을 들었다. 2013년 도민연대는 수형인 명부에 기재된 2530명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했다. 양동윤 도민연대 공동대표는 “정부가 할 줄 알고 기다렸지만 몇 년 동안 아무런 움직임도 없어서 결국 민간이 나서야 했다”고 말했다. 수형인 명부에는 순번, 직업, 성명, 연령, 본적지, 항변, 판정, 언도일자, 복형장소가 한 줄로 쓰여 있다. 순번으로 구성된 수형인 명부를 본적지를 중심으로 다시 분류했다. 조사원들이 마을별로 다니며 60년 전 주소를 찾아 “아무개씨 계시냐”고 물어보는 식이었다. 이사했을 경우, 물어물어 새로운 주소지로 찾아갔다.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방식이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이미 60년 가까이 지난 시점, 생존자는 극히 일부였다. 수형인 명부 외에 아무런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생존자의 증언은 매우 중요했다. 증언이 쌓일수록 흩어져 있던 편린들 사이에 연결고리가 생기고, 한데 모여 큰 이야기가 됐다. 이 과정에서 수형인 명부에 쓰인 내용이 실제 실행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를 근거로 재심을 청구하거나 국가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도민연대 상근자는 0명이다. 양동윤 공동대표가 무보수로 일하고 조사연구원은 3명이다. 이들은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하는 ‘연구비’를 받고 생존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한다. 그리고 도민연대 활동과 연구를 지원하는 ‘지원단’이 있다. 열악한 환경은 20년째 바뀌지 않았다. 양 공동대표는 “정의감 같은 근사한 이유로 활동을 하는 건 아니다. 생존자들이 하나둘 세상을 등지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 이미 시작했으니 끝까지 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참고자료> 문소연, <늑인>, 각, 2018. 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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