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는 빈 젖을 물렸다

2019. 4. 1. 22:02진실

어머니는 굴 밖으로 울음소리가 새지 않도록 빈 젖을 물렸다


두 형제가 겪은 4.3 이야기
아버지는 자기 죽음을 예감하고, 피신가는 어머니는 제기 챙겨
"자식 잘난 죄로 죽어야 한다"..토벌대에 연행된 아버지는 총살
"큰 인물 될 것"이라며 일본에서 대학 다닌 큰 형은 토벌대에 희생
"육지 가도 살기만 하면 된다"던 둘째 형은 형무소에서 행방불명


제주 서북부 중산간 마을 금악리는 4·3 당시 큰 피해를 본 마을이다. 금악(금오름)을 포함해 마을에서 한라산까지 오름과 오름으로 이어지고, 크고 작은 자연동굴들도 여러 곳 있다. 제주4·3 당시 잠시 몸을 피하면 살 수 있다고 생각한 주민들은 해안보다는 산으로 피신해 한라산에서 한겨울을 지내야 했다.


평생 이 마을에서 살아온 양창옥(76·당시 5), 양서옥(87·당시 16) 형제도 그 속에 있었다. 4·3으로 아버지(양기삼·당시 43)와 큰 형(보옥·당시 25), 둘째 형(윤옥·당시 19)을 잃은 두 형제에게 4·3은 과거의 일이 아니다.

1948년 11월20일, 토벌대의 소개령에 따라 금악리가 소개되자 금악초등학교 6학년 서옥은 동생 창옥을 등에 업은 어머니(강기인·당시 48)와 함께 마을을 떠났다. 큰 형과 둘째 형은 토벌대의 주목을 받자 피신한 상태였다. 한림리로 내려가던 가족들에게 경찰에 연행됐던 아버지가 총살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아버지는 이날 새벽 한림리 옛 오일장 터에서 희생됐다. 행방을 수소문해온 어머니는 남편의 죽음 소식이 전해지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머니는 “이제 다 끝났구나”하고 생각했다. 두 아들의 생사도 몰랐다. 한림으로 소개 가던 어머니와 두 형제는 인근 명월리 친척 집으로 갔다.


                 

                                                         양서옥씨

토벌대는 가족 중의 한 사람이라도 집에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몰아 대신 죽였다. 두 아들이 피신하자, 아버지는 자신의 앞날을 예감했다. 창옥씨의 아내 변영자(77)씨는 시어머니로부터 들었다며 “아버님은 잡혀가기 전날부터 눈치를 챘다. 아이들에게 먹이라며 고기를 사다가 먹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자신과 두 아들을 구하려고 마지막까지 몸부림치다 수포로 끝나자 자포자기했다.

다음 날 아버지는 어머니의 통곡을 뒤로 한 채 “자식 잘난 죄로 죽어야 한다”며 토벌대가 들이닥치지 않았는데도 길가로 나갔다. 저지지서를 거쳐 한림으로 끌려간 아버지는 이틀 만에 희생됐다.

토벌대는 마을을 들락거리며 주민들을 닦달했다. 해안으로 내려가면 ‘빨갱이’로 몰려 죽을 위기에 놓인 마을 청년들은 산으로 도피했다.

949년 1월9일, 명월리에서 옹포리 수용소로 다시 소개되기 전날이었다. 둘째 형이 한밤중 가족들이 사는 곳으로 찾아와 “내려가면 다 죽는다. 산으로 올라가야 살 수 있다”고 호소했다.

창옥을 등에 업은 어머니는 피난처에서라도 제사를 지내려고 제기를 챙겼다. 변씨는 이렇게 말했다.

“큰 아버지네 집이 강 제사 먹엉 곧 들어오난 샛아덜이 문 확 열엉 빨리 글랜. 여기 살민 동생들도 죽여불고, 어머니도 죽여분덴 허난, 어머닌 어디 강이라도 제사를 해지카부덴 제사허는 그릇을 막 챙겼덴 헙디다.”(큰아버지 댁에 가 제사 지내고 금방 들어오니 둘째 아들이 문을 확 열고 빨리 가자고. 여기 살면 동생들도 죽고, 어머니도 죽는다고 하니, 어머니는 아무 데라도 가서 제사를 지낼 수 있을까 봐 제기를 챙겼다고 합니다.)

      
                                                          양창옥씨.          

친척 몰래 나와보니 길가에는 많은 주민이 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명월리에는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눈이 내렸다. 명월리 중동에서 고림동을 거쳐 금악리까지 눈길을 헤치며 올라오자, 날이 어스름이 밝아왔다. 금악리에는 어른 무릎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다. 그 눈 위로 마을은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토벌대가 올라오면서 혼란 속에 둘째 형과 마을에서 헤어졌다. 가족들은 동네 주민으로부터 큰 형의 소식을 들었다. 큰 형은 아버지가 희생되고 28일 만인 12월8일 마을에서 토벌대의 총에 맞아 숨졌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닌 큰 형은 집안의 자랑이자 희망이었다. 두 형제는 “큰 형은 인물이었다. 살았으면 큰일을 할 인물이었다”는 말을 여러 차례 되풀이했다.

1930년대 중반 아버지는 큰 형을 일본으로 데려가 노동하면서 공부시켰다. 큰 형은 대학 2학년을 마치고 해방 2년 전 고향으로 돌아온 지식인이었다. 일본군 징병 영장이 나와 일본에서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 달 사이에 남편과 큰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눈물도 메말랐다. 하지만 남은 자식들을 살려야 했다.


애월면 유수암리 산간지대 노로오름(높이 1070m) 능선에 다다랐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한 한라산 오름들 위로 달이 훤하게 비췄다. 멀리 새별오름(높이 519m)이 보였다. 새별오름을 지나 금악리에서 3㎞ 남짓 떨어진 누운오름(높이 407m) 부근 굴을 찾아갔다. 입구는 사람 하나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지만, 안은 꽤 넓었다. 굴에는 청년 2명이 피신해 있었다. 명월리를 떠나 처음으로 굴 안에서 아주머니가 비장했던 곡식을 꺼내 끼니를 해결했다. 어머니는 창옥의 우는 소리가 굴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빈 젖을 계속 물렸다.

1949년 1월 하순, 서옥과 청년들은 누운오름 정상에서 주위를 둘러보다 토벌대에 발각되자 직선거리로 5㎞ 남짓 떨어진 화전마을인 솔도 쪽으로 눈길을 내달렸다. 토벌대의 추격이 멈추고 되돌아보니 가족들이 있던 주변에서 연기가 솟아올랐다.

     양서옥씨가 4·3 당시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양서옥씨가 4·3 당시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옥과 청년들이 도망친 뒤 토벌대는 굴을 찾아 “나오지 않으면 총살하겠다”며 총을 쏘아댔다. 안에 있던 가족들은 바들바들 공포에 떨었다. 잠깐 망설이다 어머니가 먼저 나갔다. 토벌대는 어머니를 총 개머리판으로 마구 후려쳤다. 토벌대의 계속되는 총질에 모두 나왔다. 토벌대는 어머니와 아주머니를 도망가지 못하도록 줄로 묶고, 신발을 벗긴 채 한림지서까지 10㎞ 넘는 거리를 끌고 갔다. 지서에서 등에 업힌 창옥이 겁이 나 울자, 경찰은 창옥의 왼쪽 발을 잡아챘고, 이 때문에 창옥은 평생 후유증을 안게 됐다. 다음 날 어머니와 창옥은 모슬포경찰서로 이송돼 일주일을, 다시 서귀포경찰서로 이송돼 한 달 남짓 산 뒤, 배를 타고 제주읍 산지항에 도착해 제주 주정공장 수용소 12호실에 수용됐다. 2월 말~3월 초순이었다. 수용소에는 한 동에 200여명 정도씩 수용된 12개 동이 있었다.

산에는 밤이 되면 추위가 온몸을 엄습했지만, 어머니와 헤어진 서옥씨는 “추운 게 문제가 아니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기 때문에 도망칠 생각만 했다”고 말했다. 3월 하순 어느 날 초저녁, 서옥은 괴오름(높이 653m) 냇가에서 2연대 군인들에게 붙잡혀 원동마을을 거쳐 주정공장으로 갔다.

서옥은 6호실에 수용됐다. 어느 날 운동장에 나왔던 서옥이 앞사람과 부딪쳤는데 쳐다보니 3호실에 수용된 둘째 형 윤옥이었다. “저디 어머니도 왔져. 닌 어리난 어멍신디 강 살아도 된다. 나 신더래 오지 말라.”(저기 어머니도 왔어. 너는 어리니까 어머니한테 가서 살아도 된다. 내게는 오지 마라.) 기적 같은 형제의 만남이 반가울 만도 했지만, 티를 내지 못했다.

서옥은 어머니와 동생을 찾았다. 눈물도, 말도 나오지 않았다. 윤옥은 어머니를 만나 “얼마 어시민 어머님은 동생하고 집에 갈 수 이실거우다. 겐디 난 못 갑니다”고 했다. 눈물이 그렁한 어머니는 “육지 가도 살고만 이시민 되주”했지만, 다시는 윤옥을 만나지 못했다. 윤옥은 그해 7월 군법회의 재판을 거쳐 대전형무소로 이송됐고, 한국전쟁 발발 뒤 행방불명됐다. 제주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 표지석에는 그의 비석이 있다.

          

         양창옥씨가 4·3 당시 경찰이 잡아챘던 왼쪽 다리에 붕대를 감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월9일, 대통령 이승만이 처음으로 제주에 와 주정공장을 방문했다. 이승만은 수용소에 수용된 2800여명의 제주도민에게 “과거는 과거다. 충성스러운 대한민국의 시민으로 살아가라”고 일장 훈시했다. 제주도를 초토화 한 뒤였다. 서옥씨는 이날 방송을 통해 이승만이 “만 15세 이하 45세 이상은 무죄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같은 달 하순 가족들은 한림지서로 온 뒤 풀려났다.


가족들은 한림에서 1년, 명월리 고림동으로 올라와 5년을 살고, 금악리가 재건되자 올라왔다. 나이가 찬 서옥씨는 전투경찰로 지원했고, 창옥씨는 금악초등학교를 다녔다.


4·3은 두 형제에게 평생 트라우마로 남았다. 아내 변씨는 “결혼한 뒤에도 누군가가 ‘너는 사상에 걸렸다’는 말을 하면 집에 와서 엄청 울었다. 술만 마시면 4·3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울었다”고 말했다. 두 형제 모두 자식 교육을 잘 해 주위의 부러움을 산다고 했다. 창옥씨는 4·3후유장애인협회 활동을 하고 있다. 좀처럼 4·3 이야기를 하지 않는 서옥씨는 “지난해 추념식 때는 대통령의 말을 듣고 싶어 평화공원에 다녀왔다”고 말했다. “다시는 그런 시국을 만나면 살지 못하지.” 두 형제의 이야기다.


한겨레  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