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8. 5. 16:40ㆍ진실
'마지막 광복군' 김영관 한국광복군동지회 명예회장
박근혜에게 직격탄 날린 광복군.."탄핵은 역사 무시에 대한 반격"
광복군의 분포 및 활동 지역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다른 하나는 침략자인 일본 편에 서는 일입니다. 출세와 영달이 보장된 길이었습니다.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장교로 일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 등이 대표적입니다.
되찾은 나라에서는 첫번째 길에 선 사람들이 주역이 되는 게 너무나 당연하지만, 우리의 역사는 안타깝게도 반대로 흘렀습니다. 독립투사들은 홀대받고, 친일파는 득세했습니다. 정의가 거꾸로 선 상황은 역사가 아니라 아직도 생생한 현실입니다. 독립운동의 상징이자 실체였던 대한민국임시정부(1919년 출범)를 무시하고 1948년 정부 수립을 ‘건국’이라고 하는 주장은 한 예일 뿐입니다.
김영관(93) 한국광복군동지회 명예회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보다 각각 7살·4살밖에 적지 않은 동시대의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징병된 지 얼마 안 돼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해방 이후 성실하게 공직자로 살아온 광복군 출신의 노병은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속앓이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두 정권이 뉴라이트 주장대로 건국절을 추진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광복절 청와대 오찬에서 그의 ‘분노’는 대통령 앞에서 마침내 터져나왔습니다. 애국심이 가득한 그로서는 비장한 각오를 한 행동이었습니다. 노병은 1년 만에 바뀐 세상에 다소 안도하고 있습니다. 그의 여생을 편안하게 해드릴 책임은 현 세대에게 있을 겁니다.
‘건국절은 발언하지 마라.’ 지난해 청와대의 독립유공자 초청 오찬(8월12일)이 열리기 며칠 전이었다. 오찬 행사의 발언자로 선정된 김영관 한국광복군동지회 명예회장(93·이하 호칭 생략)은 중간 연락을 맡은 광복회(회장 박유철)의 요청에 따라 발언 내용을 미리 이메일로 보냈다. 광복회에서 손을 본 뒤 돌려받은 메일에는 국군의날 문제와 건국절 관련 내용만 빠져 있었다. 대통령(박근혜)이 싫어할 건국절 관련 내용은 빼고 덕담만 해달라는 무언의 주문이었다. 광복회 견해라기보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나 청와대의 뜻이었을 것이다. 이어 광복회와 보훈처 관계자가 오찬 때 건국절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이냐고 각각 전화로 물어왔다. 그는 “내게 맡겨라. 분위기 봐서 하든지 말든지 하겠다. 내가 책임지겠다”고 모호하게 답했다. 행사 당일에도 건국절 발언을 할 것인지 체크받았지만, 그는 “현장 상황을 보고 결정하겠다”고만 말했다.
8월12일 청와대 오찬 때 김영관은 헤드테이블에서 박근혜의 왼편 둘째 자리를 배정받았다. 마이크를 받은 그는 먼저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정비와 하얼빈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개관 등에 대해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라며 고마움을 표했다. 이어 그는 발언을 말아달라고 요구받았던 국군의날 변경을 건의했다. “남북통일을 기원하면서 민족상잔의 6·25 전쟁에서 기념일(육군 3사단이 38선을 돌파해 북진한 날, 1950년 10월1일)을 택한 모순과 불합리를 아직도 시정하지 못하고 있다. 뿌리있는 강군을 육성하기 위해 조정해야 한다. 대안으로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뜻이 있는 광복군 창설일인 9월17일을 국군의날로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가”라고 제안했다.
‘지난해 청와대 오찬 발언’“‘건국절 발언 빼라’ 사전 요구‘내게 맡겨라’ 뒤 전격 발언하자박 대통령, 표정 굳어진 채 외면‘몸조심하라’ 인터넷 협박도 받아” ‘건국론의 배경’“뉴라이트와 극우 뿌리 강해다시 건국절 들고나올 것이들 논리 먹히지 않게‘올바른 역사’ 정착시켜야”반일 성향의 선비 집안 성장경성사범학교 징집 1호 되자충칭 임시정부 찾아 탈출광복군 합류해 독립운동은퇴 뒤 독립정신 계승 앞장6·25 땐 자진입대 애국 실천“탄핵은 올 게 빨리 왔을 뿐역사 무시한 데 대한 보복”
건국절 주장에 대해서는 “역사를 외면하는 처사일 뿐 아니라 헌법에 위배되고, 실증적 사실과도 부합되지 않고, 역사 왜곡이고, 역사의 단절을 초래할 뿐”이라며 “대한민국은 1919년 4월11일 중국 상하이에서 탄생했음은 역사적으로도 엄연한 사실이다. 왜 우리 스스로가 역사를 왜곡하면서까지 독립운동을 과소평가하고, 국난 시 나라를 되찾고자 투쟁한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를 외면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어조는 차분했지만, 박근혜 정부가 건국절을 추진하는 데 대해 광복군 노병이 날리는 직격탄이었다.
“올바른 역사인식 문재인 정부에 감사”
-작심한 발언이었던 것 같다.
“8·15 행사를 건국절(1948년 정부 수립)로 하겠다는 시도는 이명박 정부 때부터 시작됐는데 그때는 우리(독립유공자)들이 난리쳐서 무산됐다. 박근혜 정부는 초반에는 잠잠하더니 2015년 광복절에 대통령이 ‘건국 67년’이라는 표현을 공식적으로 썼다. 문제가 심각하다고 봤다. 그래서 광복회 등에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장관에게 얘기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 대통령한테 직접 건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침 지난해 청와대 오찬에 나를 초청하면서 생존자와 유족을 대표해서 인사하라고 해서 잘됐다고 여겼다. 스무살 때 광복군을 찾아갔던 마음을 잊지 말고 욕을 먹더라도 할 말을 하자고 생각했다. 나름 비장한 각오로 했다.”
-발언 이후 불이익은 없었나?
“덕담할 때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얼굴이 밝더니 건국절 얘기할 때는 대통령 표정이 바뀌더라. 대통령한테 대든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보훈처가 곤란하게 될 것이라고 봤다. 보훈처 간부 등에게 물어봤더니 별일 없다고 하는데 아마 긁어 부스럼 만들까봐 아무 일 없다고 한 것 같다.”
-청와대 발언 뒤 침묵했는데 혹시 압력을 받았나?
“청와대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부터 언론의 인터뷰 요청과 주변 지인들의 전화가 쏟아졌다. 심지어 인터넷 댓글에는 ‘몸조심하라’는 협박도 있었다. 그런 게 겁났던 것은 전혀 아니고, 일국의 대통령한테 평민이 대면해서 건의했는데 거기에 다른 말을 덧붙이면 예의가 아니지 않나. 그래서 일체 발언을 삼갔다. <한겨레>도 여러 차례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제때 응하지 못해 미안하다.”
김영관은 청와대 발언 이후에도 건국절론에 대한 단호한 비판을 계속해왔다. “왜 우리는 스스로 독립투쟁 역사를 과소평가하고, 국난 시 잃은 나라를 되찾고자 투쟁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를 외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네. (…) 역사의 진실은 만고불변이라고 생각하며 누구든 자파의 이익을 위해 색안경을 통한 역사 왜곡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네.”(2016년 12월 임시정부기념사업회의 ‘100년 편지’. 고인이 된 광복군 동지 4명에게 쓴 글 중에서) 지난 3월에는 ‘100년 편지’와 지난해 광복절 오찬 발언, 건국절 주장이 왜 문제인지를 비판한 글 등을 모은 소책자(<대한민국은 1919년에 탄생하였다-건국 논란에 부쳐서>)를 만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지난 1년 동안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건국절을 주장하는 정부가 물러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올해 8·15를 맞는 감회는 남다를 텐데.
“지난 현충일 기념식에 참석해달라고 보훈처에서 하도 간곡하게 말해서 나갔다. 내 옆의 두 자리를 비워뒀는데 경호원 자리라고 해서 그런가 보다고 했다. 그런데 대통령 부부가 앉아 깜짝 놀랐다. 예전 정부에서는 우리를 초대해놓고 구석 자리에 앉히는데 이번에는 주빈석에 배치했다. 대통령 기념사도 역대 정부와는 차이가 많았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얘기를 대통령이 직접 했다. 그만큼 우리의 아픈 역사를 올바르게 받아들인 것 같더라. 또,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국정교과서를 폐기했다. 건국절 만들려고 이전 정부에서 국정교과서를 만들었던 것 아니냐. 그런 점에서 문재인 정부에 고맙다.”
임시정부 존재가 탈출의 원동력
-이번 8·15 행사에도 초청받았는가.
“14일 오찬 행사에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청와대 가는 마음이 무거웠는데 이번에는 가볍다. 건국절 걱정을 안 해도 되지 않나.”
-발언도 하나?
“그건 모르겠다. 만일 내가 얘기할 기회가 있다면 대통령이나 고위공직자들한테 이 말은 꼭 하고 싶다. 뉴라이트와 극우파는 조직이 세고 학벌과 재력이 있다. 관직에도 뿌리박혀 있고, 심지어 언론도 장악하고 있다. 지금은 엎드려 있지만, 언젠가 그들이 다시 나올지 모른다. 정권이 바뀌어도 이들이 건국절을 다시 들고나오지 못하도록 올바른 역사를 제도적 법적으로 정착시켜야 한다. 우리가 나라를 잃고 36년간 국민들이 고생하면서 나라를 되찾았는데 어떻게 독립운동을 말살하는 주장을 버젓이 하나.”
-건국절 주장 등이 나올 때마다 마음이 많이 상할 것 같다.
“분통이 터지지만 화만 내고 있을 수는 없다. 죽을 때까지 건국절 얘기가 왜 부당한지 일제강점기에 당했던 설움이 뭔지 등 올바른 역사를 말로든 글로든 알려주려고 한다. 우리 역사가 반만년인데 건국한 지가 69년밖에 안 됐다는 게 말이 되나. 1948년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지 건국이 아니다. 일본도 메이지유신으로 새로운 나라가 탄생했지만, 메이지유신을 건국절로 떠받들고 있지는 않다.”
김영관은 1924년 경기도 포천군 영송면의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부뿐 아니라 증조부까지 함께 생활한 대가족이었다. 증조부는 단발을 거부하고, 항상 흰 도포에 갓을 쓰고 다니는 등 항일의식이 강했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 탓에 김영관도 어릴 때부터 반일 기질이 다분했다.
서울 선린상업학교 5학년(1943년) 시절 “사발통문을 통해 충칭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흥분했다. 나는 이제 더는 나라 잃은 망국인이 아니고 당당히 우리 정부를 갖고 있는 대한 남아라는 기쁨과 자부심으로 가슴이 뿌듯함을 느꼈다.”(<저 산을 넘어서-어느 한국광복군 노병의 회상과 바람>, 김영관 지음, 1997년). 충칭 임시정부의 존재는 나중에 그가 일본군을 탈영하는 원동력이 됐다.
상업학교 5학년(1943년) 때 중국 충칭에 임시정부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커다란 자부심을 가졌다”
고 밝혔다. 김영관 제공
김영관 한국광복군동지회 명예회장(아래 왼쪽)은 6·25 때 자진해 또다시 군에 입대해서 공병 장교
로 근무했다. 1953년 군 동료들과 함께한 모습. 김영관 제공
그는 일본군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징병 연기 혜택이 주어지는 경성사범학교(지금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1944년 봄 입학했다. 그러나, 그해 가을 빨간딱지(징집영장)가 나왔다. 사범학교 징병 1호였던 그는 광복 뒤 동창들한테 “우리 학교에서는 유일하게 너만 징병됐다”는 말을 들었다.
김영관은 함경도 함흥의 일본 육군 제43부대에서 한달 남짓 훈련을 마친 뒤 그해 11월 중국 저장성 둥양현(東陽縣)에 배치됐다. 일본으로서는 중국한테 빼앗은 땅인 항저우와 상하이를 방어하기 위한 최일선 지역이었다. 함흥을 떠난 기차가 중국으로 향할 때부터 김영관은 ‘탈출 뒤 충칭 임시정부 합류’라는 계획을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광복군 태극기 보고 흘린 눈물이 나의 초심
부대에 도착한 직후부터 김영관은 탈출에 대비해 지형지물을 익히는 한편 주변 정보를 수집해 나갔다. 또, 함께 탈출할 동지를 규합했다. 40여명의 부대원 중 조선인은 4명이 더 있었다. 그중 강화 출신의 신의철과 고양 출신의 김권이 흔쾌히 동조했다. 미리 약속한 암호로 탈출 계획을 담은 편지를 써서 고향의 동생에게 부쳤다. 마침내 12월3일 일요일, 저녁을 먹은 뒤 화장실에 가는 척하면서 부대의 철조망을 넘었다. 3명의 탈출자는 밤새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이튿날 저녁 한 마을에서 중국 청년들을 만나 필담을 나눴다.
“우리는 한국 청년으로서 일본 군대에서 탈출했다. 충칭에 있는 한국 임시정부에 가고 싶으니 장개석 군대가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달라.”
“탈출을 환영한다.” “고생 많았다.”
중국 청년들은 뜨거운 박수와 포옹으로 김영관 일행을 맞아줬다.(<저 산을 넘어서>) 하지만 고난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찾아가는 도중에 일행 5명(다른 일본군 부대에서 탈출한 박승유, 이희화가 도중에 합류)은 차례로 풍토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1천여킬로미터를 걸어 장시성 옌산(鉛山)에 1945년 2월 중순 도착했다. 중국군의 주선으로 옌산에서 마침내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장 이소민을 만났다.
-탈출한 뒤 거의 석달 만에 광복군을 만났는데.
“정말 감격적이었다. 우리가 머물고 있던 중국군 부대로 이소민 구대장의 인솔 아래 젊은 청년 7~8명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걸어왔다. 그때 태극기를 처음 봤지만, ‘태극기에 대하여 경례’ 구호에 맞춰 거수경례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양 볼에 줄줄 흐르더라. 애국가 제창 때도 우리 탈출병 5명은 곡(당시는 영국 민요인 ‘올드 랭 사인’이었음)을 몰라서 따라 부르지 못했지만, ‘동해물과 백두산이’ 하는 가사를 들으면서 그저 눈물이 흐르고 또 흘렀다. 그 순간을 영원히 못 잊는다. 그때의 감격이 내게는 초심이다. 양심대로, 또 나라 배반하지 않으면서 거창하지 않더라도 국가와 사회를 돕자는 생각으로 지금껏 살아왔다.”
-학도병으로 끌려와서 탈출해 광복군으로 활약했던 장준하(전 <사상계> 사장), 김준엽(전 고려대 총장)을 만났나?
“그 두 분은 탈출해서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까지 갔지만, 우리 일행은 이소민 부대에 합류해서 장시성 허커우진(河口鎭)에서 광복 때까지 활동하는 바람에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김구 선생도 귀국 전에 상해에서 뵈려고 했는데 워낙 혼란스러운 상황이어서 못 만났다.”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17일 중국의 임시 수도였던 충칭에서 “한·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한국광복군 선언문)으로 내걸고 창설됐다. 총사령에 지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이 임명됐다. 1942년 5월에는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됐다. 해방 직전 편제는 제1지대장 김원봉, 제2지대장 이범석, 제3지대장 김학규였다.
이승만 때는 광복군 경력 오히려 숨겨
광복군은 2차 세계대전 말 중국에 파견돼 있던 미국 전략사무국(OSS)과 협약을 맺고 국내 진격훈련을 마쳤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장준하와 김준엽은 미 전략사무국의 훈련을 받았다. 해방 후 미 군정이 임시정부 요원들을 개인 자격으로 입국시킴에 따라 광복군도 무장해제를 당한 채 개별 귀국했다. 광복군은 1946년 5월16일 “여러 해 동안 항전복국(抗戰復國)의 정신으로 싸워오던 광복군은 일본의 항복으로 중국에서의 작전임무는 완료되고,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 새로운 국가 건설에 이바지하기 위해 복원한다”(한국광복군 복원선언서)는 말을 남기고 공식적으로 해체됐다. 김영관도 1946년 3월 다른 동지들과 함께 ‘개인 자격’으로 미군 상륙용 함정(LST)을 얻어 타고 귀국했다. 1년여 동안 조국 해방을 위해 사선을 넘었던 그의 소지품은 옷가지 몇벌과 책 몇권이 전부였다.
-귀국 당시의 느낌은 어땠나?
“부산항에 도착하자마자 내려서 땅에 키스를 했다. 꿈에도 그리던 고국에 왔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하지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고 보니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광복군의 이름으로 명예스럽게 환국해 조국 건설의 초석이 되고자 했던 우리들의 꿈과 희망이 여지없이 무산됐다는 생각에 무력감이 밀려들었다.”
김영관은 귀국 전에 편지를 미리 부쳤지만, 38선 이북에 있던 고향집에 배달되지 않았다. 강대국의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 대립이 빚은 분단은 귀국한 광복군의 삶을 뿌리부터 흔들었다. 평소 인심이 후하다는 평을 받은 집안이었건만 부르주아 물이 들었다는 쑥덕거림의 대상이 됐다. 결국 김영관 가족은 얼마 뒤 야밤에 38선을 넘어 남으로 내려왔다. 그는 민족대학을 지향하며 문을 연 성균관대(법대)에 입학하는 한편 초등학교 교사로 취직했다. 6·25가 터지자, 김영관은 다시 군에 입대해 공병부대 장교로 근무했다. “나이가 많은데다가 교원이어서 입대하지 않아도 됐지만, 전쟁 초기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 잔류했던 경험 때문에 입대를 자원했다.”
제대 후 그는 공채로 철도청에 취직했다. 경리국장과 기획관리실장 등 요직을 거친 뒤 차장을 끝으로 1982년 퇴직했다. 이승만 정권 시절 그는 철도청에서 자신이 광복군 출신이라는 사실을 주변에 말하지 않았다. “당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친일파들을 중용하는 상황에서 광복군 경력을 말해봐야 손해만 볼 게 뻔했다. 실제로 초창기 철도청에는 일제 때 일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설움을 많이 받았다.”
김영관 한국광복군동지회 명예회장이 홍익회장 시절이던 1986년 7월 충남 천안의 독립기념관 앞
뜰에 ‘한국광복군 선언문’ 기념비를 세우고, 그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김영관 제공
그러나 김영관은 광복군 출신임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는 홍익회장 시절인 1986년 7월 천안 독립기념관 앞뜰에 ‘한국광복군 선언문’ 기념비를 세웠다. “과거 30여 년간 일본이 우리 조국을 병합 통치하는 동안 우리 민족의 확고한 독립정신은 불명예스러운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무자비한 압박자에 대한 영웅적 항쟁을 계속하여 왔다. (…) 우리들은 한중 연합 전선에서 우리 자신의 계속 부단한 투쟁을 감행하여 극동 및 아세아 인민 중에서 자유, 평등을 쟁취할 것을 약속하는 바이다.” 1940년 9월17일 광복군 창설을 앞두고 한국광복군 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가 발표한 선언문의 일부다. 이 기념비는 광복군과 관련된 국내 유일의 기념물이다.
광복군동지회(회장 이영수)는 1965년 설립됐다. 당시 회원이 550명 정도였지만, 지금은 29명만 생존해 있다. 그중 사회적 활동이 가능한 사람은 김영관이 거의 유일하다. 그는 아직도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 채 바깥나들이를 하고 있다. “공직 은퇴 뒤 60~70대에 등산을 열심히 한 것 외에 특별한 건강 비결은 없다”는 그는 지금도 매일 신문 2부씩과 새로운 책을 구해 읽고 있다.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 사회 분위기를 알고 싶어서 책을 본다.” 그의 서재 책상에는 최근 읽은 <건국절과 소녀상>이 놓여 있었다. 페이지 곳곳에는 그가 읽으면서 줄을 치거나 둥그라미를 그린 흔적이 뚜렷하다.
“자유한국당, 또 건국이라니 정신 나간 것”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기, 이승만 독재, 4·19,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 등 우리 현대사의 굴곡을 몸으로 겪었다. 돌아보면 어떤가?
“우리가 왜 나라를 뺏겼는지를 알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면 역사에서 배워야 하는데 역대 정권에서는 그런 게 별로 없었다. 이승만 정권은 독립운동에 대해 의식적으로 배제하고 독재정치로 흘렀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도 독립운동을 무시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김영삼 정권에서 비로소 총독부 건물 철거 등 민족정신을 살렸다. 김대중 정권은 그동안 셋방살이를 전전하던 백범기념관을 지었다. 문재인 대통령에 이르러서야 임시정부기념관을 짓겠다고 약속했다. 참으로 진전이 느리다.”
나라를 위해 몸을 던졌던 광복군 노병은 촛불집회와 대통령 탄핵 사태에 대해서도 상황 파악이 자세하면서 단호했다.
-지난해 촛불집회는 나가봤나?
“데모하는 데 익숙지 않아서 나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올 게 왔을 뿐이고, 시기가 당겨졌다고 생각한다. 민심이 천심이다.”
-무슨 뜻인가?
“최순실이 인간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좋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이 비서실장을 일주일에 한두 번밖에 안 만날 정도로 이상하게 국정운영을 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또, 역사를 무시하고 망국의 원인을 깡그리 잊어버린 데 대한 보복이자 반전이기도 하다. 우리가 오늘날까지 혼란스럽고 분단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나라를 잃은 데서 비롯됐다. 그런 역사를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며, 정치적으로도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김영관 한국광복군동지회 명예회장이 1999년 금강산을 방문해 귀면암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김 명예회장은 70대까지 한라산과 설악산 등을 등반했으며, 90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도 바깥나들이와
활발한 지적 활동을 하며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김영관 제공
광복군 노병이 현재와 미래의 주역들에게 주는 충언을 정리하던 지난 2일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의 혁신위원회(위원장 류석춘) 혁신선언문이 나왔다. 자유한국당은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이 옳고 정의로운 선택이었다는 ‘긍정적 역사관’을 가진다”며 또다시 ‘건국’론을 전면에 내세웠다.
“1948년 건국이라는 논리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는 헌법 부정일 뿐 아니라 대한민국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런 자기모순이 어딨나. 정신 나간 사람들 같으니라고.” 추가 인터뷰를 위해 건 전화기 너머에서 노병의 분노와 안타까움이 섞인 한숨 소리가 커졌다.
[한겨레]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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